당시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동지사(冬至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동지사는 조선시대에 명나라, 뒤에는 청나라에 보내던 사신으로 대개 동지(冬至)를 전후하여 갔기 때문에 동지사라 하였다.
정사(正使)는 3정승(政丞) 6조(曹)의 판서(判書)가 담당하고,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종사관(從事官)·통사(通事)·의원(醫員) 등 40여명이 수행하였으며, 공물로는 조선의 특산인 인삼·호피(虎皮)·수달피·화문석·종이·모시·명주·금 등이었다.
선물을 받은 명나라나 청나라에서도 특산품을 선물하여 공무역(公貿易)형식이 되었으며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때까지 동지사가 파견되었다.
잦은 중국 왕래가 실학적 가풍에 영향 끼쳐
기록을 통해 나타난 해남윤씨가 인물들의 중국방문 사실을 보면 먼저 앞서(전 회) 언급하였던 윤홍중(尹弘中)이다. 윤홍중은 주청사서상관(奏請使書狀官)이 되어, 1559년인 36세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온다. 윤홍중(尹弘中, 1518~1572)은 윤구의 첫째 아들로 관직은 예조 정랑과 영광 군수를 역임한 인물이다.
윤홍중의 동생인 윤의중 또한 명나라에 동지사로 다녀온 인물이다. 윤의중(尹毅中, 1524~1590)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윤의중은 윤구(衢)의 둘째 아들로 고산 윤선도(善道)의 조부(祖父)가 된다. 그는 1548년(명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48년 문과에 등제한 후에 부수찬, 교리, 응교, 승지, 병조참의를 거쳐 1559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 연경(燕京)을 다녀왔다.
현재 녹우당에는 윤의중이 1562년(39세) 명나라 연경에 동지사로 갔을 때 받은 선물인 상아홀이 고산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상아홀은 1품에서 4품까지 관리가 임금님을 뵐 때 조복에 갖춰 상아로 만든 홀이다.
이와 함께 윤홍중의 아들인 윤유기(고산의 양부)또한 주청사서상관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온다. 윤유기(尹唯幾,1554~1619))는 1595년(선조28)4월~9월 세자(광해군)의 주청사서상관(奏請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오며, 이때 「연행일기(燕行一己)」를 남기기도 하였다.
해남윤씨가는 고산의 선대(先代)인 윤의중(尹毅中, 1524~1590), 윤홍중(尹弘中, 1518~1572), 윤유기(尹唯幾, 1554~1619)가 중국에 다녀왔다는 기록을 놓고 볼 때 이들이 중국으로부터 다방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서학(西學)의 영향이 해남윤씨 가에도 미쳤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서양문물이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전해져 왔으며 서학이 우리나라 실학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볼 때, 해남윤씨 가에서 많은 인물들이 중국과 교류를 했다는 것을 통해 해남윤씨가의 가학에 미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때 고산 윤선도가 가르쳤던 봉림대군(뒤에 효종), 인평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서학과 접하며 많은 교류를 했던 인물들이다. 이때 봉림대군의 형인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하면서 북경(北京)에서 활동 중이던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로부터 서양 과학과 천주교 서적 ․ 성모상 등을 선물로 받았으며 소현세자가 들여온 문물로 인한 실학의 영향 또한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해남윤씨가에서 유난히 중국에 다녀온 인물들이 많거나 중국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해남윤씨가의 독특한 ‘가학(家學)’이 이 같은 영향으로 형성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해남윤씨가 인물들이 이룩해 놓은 학문적 경향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소학(小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소학 속에는 단순한 유학으로의 의미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이를 실천하려는 사상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문적 실천성은 후에 고산윤선도를 비롯하여 해남윤씨가 인물들의 일반적인 학문 경향으로 나타나는 박학(博學)이 공재 대에서는 실학(實學)이라는 학문적 성과로 나타난다.
고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해남윤씨가의 학문 경향은 박학다식(博學多識)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찌 보면 잡학(雜學)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학문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제생활에도 적용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가풍은 양반사대부가의 경직된 윤리 생활구조와는 달리 한마디로 진취적이고 매우 다양한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았던 개방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일찍이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러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이후 실학적 성향을 띄는 해남윤씨가의 독특한 가학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서학은 당시 남인을 중심으로 실학을 추구한 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공재 윤두서를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의 실학적 학풍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순교자 윤지충은 정약용 형제의 영향
서학(西學)과 관련하여 해남윤씨가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이다. 윤지충은 공재 윤두서의 증손자로 공재의 다섯째 아들인 덕렬(德烈)의 손자이다. 그는 1789년 북경(北京)에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귀국하였다. 윤지충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최초 순교자라는 점에서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살았던 해남윤씨 가에서도 매우 특이한 인물로 해남윤씨가의 중국교류를 통한 학문적 경향을 엿보게 한다.
서학은 선조 연간부터 연행(燕行) 사행(使行)등을 통해 청나라에서 도입된 서구 문명에 대한 학문으로 이것은 대개 정권과 거리가 먼 재야 학자들 사이에 학문적 흥미의 대상이 되어, 그들의 열의를 자극시키고 마침내는 서학이라는 학문을 조성하게 된다.
윤지충은 전라북도 진산(珍山) 장고치(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나 막현리로 이주해 살던 남인 계열의 집안 출신으로 고산 윤선도는 윤지충의 6대조이자 공재의 5자인 덕렬(德烈)의 손자이기도 하다. 경기도 양근의 신자였던 정약종과 정약용 형제는 윤지충의 고종 사촌형이었다.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정씨 형제들과의 학문 교류 덕택이었다.
윤지충은 1787년~1788년 무렵에 세례를 받은 후 그동안 배워 오던 학문 대신에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상 제사 금지령을 하달하자 신주를 폐하였고 다음해 윤지충의 모친이 선종하였을 때는 전통 상례(喪禮)를 폐지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사실이 지방의 관장과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신해년에 일어난 ‘진산사건’이 된 것이다.
윤지충은 내외종간인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감동해 믿기로 작정하였다. 또한 가까이 사는 외사촌 권상연도 윤지충에게서 ‘천주실의’등의 교리서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윤지충이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를 통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가문으로 볼 때 정약용은 공재의 외증손이요 윤지충은 증손자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소외된 남인계 학자들이었다는 데에서 매우 긴밀한 관계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해남윤씨가에서 오래전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전해진 서학은 해남윤씨가의 가학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러한 서학을 통해 다산 정약용과 교류를 가졌듯이 해남윤씨가의 가학이 다산의 실학에도 영향이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장서 중에는 유독 중국서적들이 많다. 이 책들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남윤씨 관련문서로 수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관련 서적들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구입했을 것으로 보여, 해남윤씨가에 들어와 학문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 같은 해남윤씨 인물들의 중국교류 사실과 소장 전적에서 해남윤씨 인물들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학문적으로 실학적 성향의 학풍을 결정짓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