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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동네에서 조그마한 슈퍼를 운영했다. 수많은 과자들과 아이스크림들이 쌓여있는 슈퍼마켓은 동네 꼬마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모님이 잠시 가게 자리를 비운 사이 놀러온 친구들에게 과자를 나눠 줄 때면 나는 우리 동네 골목대장이 되곤 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생 6학년쯤인가 도심에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한 대형 할인점들은 나의 부모님을 비롯한 영세 소매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가까운 곳에 할인점이 들어서면서 슈퍼마켓 점포를 정리했다는 주위 얘기가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참으로 심각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내가 중학생 때 부모님은 슈퍼를 정리하시고 말았다.

갑자기 할인점 이야기가 생뚱맞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한국기업이 시장을 거의 점유하고 외국계 할인점인 월마트도, 까르푸도 한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는 마당에 할인점 이야기가 FTA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할인점이라는 시장이 만들어 진 것은 분명 개방의 물결 속이었다.


경쟁에서 절벽에 내몰린 서민들이 가야할 곳은?

미국은 세계 최고의 서비스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서비스 산업은 분명한 열세이다. 단순한 관세 철폐를 넘어서 내국인 수준의 대우를 약속하는 한미FTA는 미국의 메머드급 기업들을 한국 시장으로 달려들게 할 것이다. 분명 경쟁 속에서 한국이 꼭 패배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월마트나 까르푸를 이겨낸 한국 할인점 업계의 사례처럼 대기업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키울 수도 있다. 큰 규모의 기업들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개별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이를 만회할 여유가 있기에 FTA를 자기 혁신의 기회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경쟁 속에 절벽 위로 몰리는 다수의 영세업자들이다. 열악한 그들에게 한 번의 실패는 되돌릴 수 없는 자멸을 의미한다. 미국의 선진 기술과 서비스에 대적할 수 있는 한국의 중소업체는 얼마나 될까. 정부는 FTA를 통해 양극화마저 해결할 수 있다지만, 그것이 신빙성 없게 들리는 것은 나의 이해력 부족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국가가 기업처럼, 경쟁력이 없는 국민은 무조건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굳이 국가가 존재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매번 물고기를 잡아줄 순 없다지만, 적어도 낚시방법을 가르쳐 주긴 해야 할 것 아닌가."


다소 길게 인용한 위의 글은 주세운(대학생)씨가 쓴 것입니다. 희망제작소(박원순 상임이사)가 주최한 월례포럼 '희망모울'에서 발표된 글이죠. 정부 당국자들은 막연하게 한미FTA가 조성할 경쟁체제 속에서 주어질 기회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무수히 도태될 우리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자는 얘깁니다.

충치 치료값이 2만원에서 16만원으로 뛴다면...

지난 21일 배제대 학술지원센터 1층 세미나실에서 '한미FTA는 내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은 전문가들의 목소리보다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한미FTA와 관련해 수많은 토론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지만 막상 시민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이날 포럼에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도 다녀갔습니다.

우선 제가 어줍지않게 이날 토론을 정리하기보다는 이날 참석했던 시민패널 '지혜나누미'들의 이야기를 좀 더 소개하겠습니다.

"미국 측에서 주장하는 민간의료영리법인이 탄생하면 충치 치료 값이 2만원에서 16만원으로 오를 것이다. 충치를 1개만 치료할 수는 없다. 어린이들에게는 6~7개의 충치가 발생한다. 이걸 서민들이 어떻게 감당하나. 또 의료영리법인이 허용돼 진료수가가 엄청나게 상승한다면 이제 청년기의 한국인들은 얼굴의 심미적 형태나 치아의 배열상태만 보아도 가정의 경제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현실이 될 것이다." (신명식·대전푸른치과 원장)

"최근 깐느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봉준호 감독의 처녀작은 <플란더스의 개>였다. 작품성은 인정받았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만약 봉준호가 줄어든 스크린쿼터 체제 속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면 그는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마도 우리는 <살인의 추억>을 만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습작'의 기회가 사라진다면 과정없이 빛나는 극소수의 천재들만이 영화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다. 이는 기형적인 시장이다."(박광철·대학생)

"한미FTA찬성론자들의 주장을 단순화시켜보면 경쟁에 내몰고,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경쟁에서 이기면 찬란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승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한다. 이는 희망일 뿐 국가정책을 위한 과학적 태도는 아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경쟁에 내몬다고 강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막무가내로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보다 과학적 트레이닝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히딩크 감독에 의해 입증되지 않았나."(조현우 지혜나누미)

교육시장 일부 개방해야... 교육 질 높여야할 게 아닌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한미FTA에 대해서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이은정(회사원)씨는 '교육시장 일부 개방을 찬성한다'는 제목의 글(자료집)을 통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교육시장 개방을 통해 한국 대학, 대학원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알려져있듯이 한국 대학의 교육 수준은 너무도 낮다. 현재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 학생의 숫자는 8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는 외국으로 유학한 학생의 13.5%로, 국적별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좋아서 떠난 사람도 있겠지만, 한국에서의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를 떠나 유학의 길을 간 것이 아닐까 싶다."

한참동안 지혜나누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대학생은 이날 발제자인 이해영 한신대 교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미FTA, 지금 시기에 이걸 꼭 체결해야하는 건가요."

왜 미국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나

이에 대해 이 교수의 답은 명쾌했습니다.

"안해도 됩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청와대를 폭격하겠습니까. 본질적인 것이 경제적 이익인데, 우리가 손해난다면 체결하지 않아도 되지요. 문제는 공미주의입니다. 미국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영화문제(스크린쿼터)도 끝난 게 아닙니다. 지구가 망할 때까지 싸울겁니다. 미국은 자국영화의 비율이 94%입니다. 세계시장 점유율은 우리가 2%인데, 미국은 70-80%정도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이 되겠습니까."

이 교수는 '메기론'을 예로 들었습니다.

"미꾸라지가 사는 논에 메기 한 마리 풀어놓으면 미꾸라지가 살기 위해 발버둥대느라 맛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 유명한 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메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미국서비스라는 메기로부터 살아남으려고 갖은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혹 살아 남으면 튼실한 경쟁력을 갖춘 놈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비스개방을 통한 경쟁력 강화론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대책없는 개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가 한미FTA의 중요 관전포인트입니다. 그런데 월드컵처럼 관전포인트 체크하면서 놀기에는 현실이 너무 엄중하지 않습니까."

법률시장 개방과 관련해 발제를 한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 교수는 조심스럽게 낮은 수준의 FTA를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고시라는 진입장벽을 세운 채 법률지식을 달달 외우면 통과되는 법조 인력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또 이들을 획일적으로 연수시켜서 성적을 매긴 뒤 판검사와 변호사를 만들어냅니다. 얼마되지 않는 변호사들은 거의 송사에 매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개방되면 지적재산권 등 국제적인 소송에 대해 대비해야하는 데…. 하루빨리 사법개혁을 해서 개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법조인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따라서 낮은 수준의 FTA로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현실에 맞는 맞춤형 FTA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행기간을 길게 잡으면 20년여년 이상 준비기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포럼에 참석했던 지혜나누미들.

미들급 한국, 세계 헤비급 챔피언 미국을 이길 수 있을까

최 교수 다른 발언을 부분적으로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경제는 미들급인데 세계 헤비급 챔피언하고 붙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기면 좋은 데 그렇지 않으면…. 서비스산업의 경우 우리의 경쟁력은 미국의 50%이하입니다. 게임을 하면 뻔한 것 아닌가요. 80%정도만 되면 한번 붙어볼 수도 있는데. 일부에선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야구와 축구를 예로 들면서. 하지만 그들은 몇 년동안 피땀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슨 노력을 했나요. 법률시장 개방과 관련해 일본은 미국과 15년동안 협상했습니다. 그런데 우린 무엇을 준비했다고 5년안에 체결하겠다는 건지."

미국의 진짜 속셈은?

이날 또다른 발제자로는 곽수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이 참석했습니다. 그는 '한미FTA 체결 이후 산업구조 변화 예측'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는데, 조심스러웠습니다. 자료집에도 '본고를 인용 또는 보도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집필자의 인지와 허락을 득해야 합니다'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미처 그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그의 발언에 대한 소개를 생략합니다. 하지만 한마디 하자면, 그는 한미FTA의 명암에 대해 분석한 뒤 우리 경제에 충격보다는 촉매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이날 포럼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포럼을 취재했던 저는 개인적으로 FTA문제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생생한 말들이 귀에 박히더군요.

이날 포럼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지혜나누미 안기종(한국 백혈병 환우회 사무국장)씨의 발표였습니다. 개인의 생명을 담보로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미국의 진짜 속셈에 대한 고발이었습니다.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은 20조의 건강보험시장 노리고 있다"

"미국은 1999년에 혁신적 신약의 약가를 선진7개국(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스위스)의 평균공장출하가로 결정할 것을 한국정부에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러한 A7 조정 평균가 제도가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가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이다.

글리벡을 먹고 있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의 경우 5년 생존율이 90%에 이른다. 만성골수성 백혈병이었던 성덕 바우만이 2001년 이후에 진단을 받았다면 골수이식을 할 필요 없이 글리벡만 먹으면 평생 살 수 있다.

글리벡은 1캡슐당 2만3045원이다. 환자가 하루에 4~8캡술을 먹기 때문에 한 달 약값이 300만원~600만원이다. 웬만한 부자도 1년에 3600만원~7200만원이나 하는 약값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 백혈병 환우회에서는 글리벡과 동일한 효능을 가졌지만 가격은 글리벡의 1/20 이하에 불과한 인도제약사의 카피약 '비낫'(1캡슐당 1달러= 960원)을 수입할 수 있도록 글리벡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를 촉구하였다.

강제실시가 허용되면 특허권자인 노바티스 외에 제3자가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생산, 판매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특허청은 글리벡 강제실시에 대해 불허 결정을 내렸고 건강보험재정으로 환자 1인당 한달에 약 300~450만원을 다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에 약값으로 지불해야 했다.

글리벡은 2006년 현재 한국에서 2000명 정도의 백혈병 및 GIST 환자가 먹고 있는데 1년에 800억원 정도의 건강보험재정이 지출된다. 그리고 매년 환자는 200명 이상 늘어나고 있고 그에 따라 약값은 100억원 이상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2년만 지나면 환자 2400명을 위해 1년에 건강보험재정 1000억 원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에게 꿈의 신약이라고 불리는 '글리벡'이라도 10% 정도의 환자는 내성이 발생하고 이들은 골수이식을 받지 않는 한 3~6개월 안에 사망한다.

그런데 2006년 6월 28일에 글리벡 내성이 생긴 환자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는 '스프라이셀'이라는 신약이 FDA 승인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곧 시판될 예정인데 예상 가격이 한 달에 500~600만원 정도이다. 원래는 죽었어야 할 환자가 신약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지만 그에 따라 엄청난 약값은 환자와 건강보험의 부담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글리벡과 스프라이셀은 평생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하는 약이라는 것이다. 특허권과 선진7개국의 조정 평균약가제도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된다면 몇십년 후에는 글리벡 한 종류의 약을 먹는 수천명의 환자를 위해 수천억 원의 건강보험재정이 지출될 것이고 결국에는 건강보험재정이 파탄될 것이다.

이러한 건강보험재정의 악화는 한국과 달리 사보험 중심인 미국의 실손형 민간보험을 한국내에서 활성화시킬 것이고 이를 통해 20조의 건강보험시장도 잠식할 큰 로드맵을 미국은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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