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5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뒤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이번 사태가 파국으로 갈 지 아니면 지난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처럼 극적 협상으로 끝날 지 아직 예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비교적 분명한 것은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문제는 그 어떤 식으로 끝나든 노무현 정부가 패배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94년 김영삼 정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1994년 1차 북핵위기는 타협으로 끝났고 북한과 미국은 각자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김영삼 정부는 유일한 패배자였다.
1993년~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북한과는 대화할 수 없다"며 대북 강경책을 구사했다. 북한은 유엔이 경제 봉쇄를 결정하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김영삼 대통령은 중국까지 찾아가 동참을 요구했다.
자신의 논리에 따라 북한에 대해 강경 대응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문제는 스스로 먼저 북한과의 대화를 끊었고 퇴로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퇴로가 없으니 우왕좌왕했다. 1994년 6월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을 폭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김영삼 정부는 "전쟁은 절대 안된다"며 막아섰다. 당시 전쟁 임박설로 남한은 사재기가 난무하는 등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1차 북핵위기는 그해 11월 북미 제네바 합의로 극적으로 해소됐다. 미국은 북한의 핵 동결 대가로 100만㎾급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했다. 총 공사비 46억달러 가운데 한국이 70%를 부담했다.
그러나 한국은 북미협상 과정에 옵저버 자격으로도 참가하지 못했다. 북미 제네바 협상장에는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 들었다. 이들은 북한과 미국이 대체 무슨 밀담을 나누는지 회담장 밖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언론인들 틈에 한국 정부의 관리들도 끼어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미국이 우방인 한국을 제쳐놓고 북한과 비밀대화를 나눈다고 발끈했다. 그러나 냉온탕을 왔다 갔다는 하는 김영삼 정부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클린턴 정부는 한국을 우습게 알았다.
한미동맹을 그토록 강조했던 보수 성향의 김영삼 정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북한으로부터는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 결과 발언권은 전혀 없으면서 경수로 비용 대부분을 떠안아야 했다.
쌀과 비료 지원 중단이야말로 대북 제재
현재 노무현 정부는 보수진영으로부터 대북 제재에 미온적이며 미국·일본과 충돌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희박하다.
지난 5일 북한 미사일 발사 뒤 남한 정부는 쌀 50만t 차관 제공과 비료 10만t 추가 지원을 중단했다. 정부는 "이는 유엔의 대북 결의안에 따라 제재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미국과 일본이 취하는 제재 조치보다 한국의 쌀과 비료 지원 중단이 북한에 훨씬 더 큰 타격을 준다"고 말한다.
북한의 한해 식량 필요량은 650만t 정도고 해마다 200만t 정도가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한국의 쌀 50만t과 비료 10만t(으로 증산 가능한 쌀)은 북한의 한 해 식량 소요량의 15%정도"라고 추정했다. 미국과 일본이 거친 말을 하고 있지만 북한이 이들 나라와 맺고 있는 경제관계가 거의 없기 때문에 '종이 폭탄'에 불과하다.
쌀 50만톤 차관 제공과 비료 10만톤 지원은 북한 주민들의 생존에 직결되는 사안이다. 이를 끊어버리고 말로만 "대북 제재나 압박에 반대한다", "대처 방안을 놓고 한미간에 이견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 정서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장기적으로 치밀하게 추진해야 하는 대북 정책을 정서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치적 무능력을 자인한 것에 불과하다. 또 국내 여론도 엄밀히 따져보면 보수진영과 진보 진영의 견해가 달랐다. 정부는 결과적으로 보수 진영의 여론을 따랐다.
정부는 "쌀과 비료의 추가 지원은 미사일 문제의 국제적 출구가 마련될 때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국제적 출구라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6자회담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정부는 미국·일본과 함께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여기에서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대한 방안을 얘기하자는 것이지 제재를 논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5자회담 방안은 이미 1년 전부터 미국과 일본의 강경파들이 주장했던 것이다. 6자회담에 진척이 없으니 북한을 뺀 5자회담을 열어 고립시키자는 의도였다. 5자회담이 열린다면 북한은 더 강경책을 쓸 것이다.
중국까지 포함한 국제사회가 5자회담을 추진해도 한국정부가 먼저 나서서 막아야 할 상황에서 거꾸로 하고 있다. 현재 한국정부의 5자회담 개최 주장의 논리는 "성경책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겠다"는 말과 비슷하다.
한국 의지만으로 대화는 유지되지 않는다
정부가 강조하는 것이 북한과의 대화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북한과 대화 채널을 닫았던 사례를 즐겨 인용한다.
그러나 지난 11일 19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남한은 미사일과 핵문제를 놓고 이 문제에 대해 발언권이 전혀 없는 북한의 내각 관리들을 상대로 따졌다. 결국 북한은 회담 시작 이틀만에 보따리를 싸고 돌아갔다. 다음 회담 날짜를 잡지도 못했다.
이후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금강산 면회소 공사를 중단했다. 22일에는 개성공단 안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 상주하던 북측 관계자 9명 가운데 정부 소속 3~4명을 철수했다. 북한은 대화의 문을 하나씩 닫고 있다.
북한은 남북대화에서 많은 파행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우리가 똑같은 수단으로 맞대응한다면 대화 동력은 확보할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남한이 확실하게 북한보다 우위에 선 뒤 남북대화는 '상호적'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이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북한을 어떻게든 회담장에 앉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시작된 햇볕정책의 핵심 수단은 정경분리였다. 그래서 1999년과 2002년 서해상에서 두번이나 남북한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수십명이 사망했지만 남북교류는 계속됐다.
이번 미사일 발사로 그 어떤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정부간의 대화는 중단된 상태다. 남한 정부 스스로가 정경분리를 포기한 결과다.
지난 20일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CBS 라디오에 출연해 "지금의 남북관계는 1990년대 초반 이래 최고의 위기상황"이라며 "모든 상황이 국민의 정부 이전, 북핵 위기가 가장 먼저 있었던 94년 근방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최근 남북관계가 꼬이고 우리정부가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원인을 인도주의적 쌀과 비료 지원을 정치 현안과 연계시킨 데서 찾았다.
최 의원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쌀·비료 지원 문제를 놓고 비교했을 때 가장 인도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최후까지 지켜야 할 게 쌀과 비료 지원"이라며 "정치적 외교안보적 사안에 쌀·비료를 연동시켜서 거부해버린 건 중요한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이런 노무현 정부식 상호주의는 집권 초반부터 계속 보였던 사고방식이다. 가까운 사례만 봐도, 올 2월 취임한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납북자 문제에 있어 성의를 보이면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열린 18차 장관급 회담에서는 북한에 대한 경공업 지원과 철도 연결사업을 연계시켰다.
즉 북한이 무엇을 해주면 남한도 무엇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한에 경제적으로 줄 것은 없다. 따라서 북한이 정치·군사적 문제에서 양보하면 남한은 경제적 보상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정경분리원칙에 대해서는 그 효과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도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옳고 그른 지를 떠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정경분리의 원칙을 깼을 때 북한이 대화에 나서지 않을 명분과 이유만 더 강해질 뿐이다.
DJ 카드에 대한 회의적 시각
많은 국내 전문가들은 현 위기를 타개할 중요한 수단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카드를 주문한다. 이는 1994년 6월 위기를 카터 대통령이 방북해 해결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에 더 얘기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지난 20일 정례 브리핑에서 "현재 북한과 국제사회의 의견차이가 가장 큰 시점이다, 대립의 각이 가장 날카롭다"며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카터 대통령이 방북할 당시도 국제사회와 북한과의 의견 차이가 가장 컸고 대립의 각이 가장 날카로웠던 시절이다.
카터 방북과 DJ 방북의 차이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카터가 방북 했을 때 김일성이 만나주고 담판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겉으로는 비공식 개인 자격이었지만 실제로는 특사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6월말 DJ가 방북을 추진할 때 정부는 전혀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는 게 남북문제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당시 이수훈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 등 고위급 관리들 입에서 거칠게 표현하면 "DJ가 방북해 통일방안 논의 등 쓸 데 없는 짓이나 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발언이 쏟아졌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20일 이종석 장관의 발언은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에 있다.
DJ카드도 안 된다면 과연 현 정부가 준비할 회심의 방책이 있는가? 남과 북이 겉으로 아무리 험한 말을 해도 핫라인이 가동된다면 우려는 상당히 줄어든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2003년 초 대북송금특검 뒤 북한과의 막후 채널이 없는 상태다.
근본적으로는 대북정책 철학의 부재가 원인
현 정부가 패배자가 되는 것은 일개 정권을 넘어서는 문제다. 표면적으로 햇볕정책을 계승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로, 김대중 정부 이래 대북 화해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형성됐던 평화 지배 블럭(전 국정원 기조실장이었던 서동만 교수가 지난 18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표현했던 말)이 깨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수십년간 자민당과 함께 일본 정치의 양대 산맥이었던 사회당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던 사태가 한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 내부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내각을 중심으로 한 상대적 온건파의 이견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가 이번에 쌀과 비료를 북한에 대한 압박수단으로 사용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그들에게 줬을 것이다. 한국의 많은 언론들은 중국의 대북 원조와 경제협력이 결국 북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킬 것이고 동북 4성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우려해왔다. 지나친 과장이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이런 남한 언론들의 보도 때문에 북한도 중국의 원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원조를 덥썩 받는 위험성을 남한 정부가 실증해 보였다. 쌀과 비료, 기타 인도주의적 지원 등 평소에는 달콤했던 당근이 위기의 순간에 채찍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만약 타협의 기미가 보인다면 정부의 인도적 지원은 재개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인도적 지원이 가지고 있던 여러 효과 가운데 최소한 도덕적 명분은 이미 상실된 상태일 것이다.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비슷한 것만은 아니다.
차이도 있다. 최소한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보수진영에서 칭찬받고 진보진영에서 비판받았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양쪽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다. 양쪽에서 십자포화를 맞는 것은 양 극단에서 '중도'를 지켰거나 '균형'을 잡았기 때문은 아니다.
말로는 미국에게 대든다. 그래서 보수진영으로부터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행동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한다. 그래서 진보진영으로부터 쓴소리를 듣는다. '미국에게 할 말은 하겠다', '동북아 균형자론' 등 말로는 자주를 내세우고 행동은 대미굴종이라고 비판받았던 자칭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의 행태는 이번 위기의 순간에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