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만 해도 안압지(사적 제18호·경주 인왕동 소재)는 신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연회 장소로만 인식되었다. 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한국 학계에서는 안압지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종전의 인식과는 달리, 안압지가 ‘흩어진 민심을 통합하여 나당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호국 시설’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안압지가 호국 시설이라는 점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정말로 호국시설이었다면 이전의 역사학계에서 안압지를 연회 장소로 격하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안압지가 호국시설이었는가 하는 점과 관련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 조경학과 안계복 교수가 1999년 12월호 <한국정원학회지>에 실은 '안압지 경관 조성의 배경 원리에 관한 연구(I)'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 내용은 논문의 주요점에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안압지가 발굴(1975∼76년)된 이후인 1978년에 <안압지 발굴조사 보고서>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에 담긴 학자들의 평가는 주로 안압지를 귀족문화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에서 C아무개 학자는 “(이는) 신라인의 긍지와 여유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J아무개 학자는 “(이는) 신라 통일왕권을 과시하는 기념사업이며 문무왕 자신의 심신 구제를 위한 환경조성사업”이라고 평가하였다. ‘안압지는 신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연회장소’라는 옛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기술도 이러한 평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안압지가 연회 장소로 이용된 적이 있다는 점은 사료 상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효소왕 6년(697), 혜공왕 5년(769), 헌안왕 4년(860), 헌강왕 7년(881), 경순왕 5년(931)에 실제로 안압지에서 연회가 열린 적이 있다.
그러나 안압지가 연회 장소로 이용된 적이 있다고 하여 곧바로 안압지를 연회 장소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통령 관저에서 이따금씩 연회가 열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 관저를 연회 장소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일반 가정집에서 생일 파티가 열렸다 하여 구청 위생과에서 그 가정집을 유흥업소와 똑같이 단속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안압지는 연회장소가 아니었다"... 기존의 견해 반박
안계복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근거로 ‘안압지는 연회 장소였다’는 기존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첫째, 안압지가 조영(造營)된 문무왕 7년(674) 시점은 나당전쟁(나당대전·670∼676년)이 벌어지던 때였다. 중요한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귀족들의 연회장소를 만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당시의 신라 통치자였던 문무왕(재위 661∼681년)은 본래 사치를 싫어한 사람이었다. <삼국사기> 문무왕 21년 7월초에 의하면, 문무왕은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에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인물이 전쟁 와중에 연회 장소를 지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안압지가 연회 장소가 아니었다면 그곳은 어떤 목적을 띤 장소였을까? 안계복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신라가 안압지를 조성한 목적은 민심 통합을 통해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안압지 조영 당시의 신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국가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672년 8월 석문전투 패배 이후 나당전쟁이 신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672년 신라에 기근이 들었다 ▲673년 1월 신라에 큰 별이 떨어졌다 ▲이 시기에 신라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673년 7월 김유신이 죽었다 ▲김유신이 죽은 직후에 친당세력인 대토가 모반을 일으켰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안압지 조영 직전의 신라에게 주어진 과제는 ‘민심 이반을 막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계복 교수는 안압지 조영은 바로 이러한 국가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논문에서 “이에 문무왕은 흩어진 민심과 국론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 안압지 조성사업을 선택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럼, 안압지를 조영하는 것과 국론을 통일하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사료에 따르면, 안압지로 판단되는 ‘궁궐 동쪽의 연못’에 용이 출현한 적이 두 번 있다. 12대 침해왕 때인 253년 4월, 13대 미추왕 때인 262년 3월 이곳에서 용이 출현한 적이 있었다.
안 교수의 분석을 정리하면 ▲안압지 터에서 이전에 용이 출현한 적이 있다는 점 ▲미추왕 때에 그곳에서 용이 출현한 적이 있다는 점은 문무왕 시기에 일정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진평왕 50년(628) 2월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신라인들에게 용은 ‘어려움을 도와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미추왕은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라인들에게는 ‘나라를 지켜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안압지 터에 얽힌 용 및 미추왕에 대한 신라인들의 관념을 활용하여 이를 국론 통합과 나당전쟁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문무왕이 안압지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게 안 교수의 결론이다. 그리고 그는 안압지에서 발굴된 삼존판불도 호국 신앙과 연결되는 아미타신앙의 표현일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상이 안계복 교수의 논문을 정리하고 그에 필요한 해설을 덧붙인 내용이다. 안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라가 당대 최강인 당나라와 전쟁을 하는 와중에 한가롭게 귀족들의 연회 장소를 세웠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국력을 총집결해도 모자랄 판국에 귀족 전용 연회 장소를 세운다는 것은 전쟁을 포기하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병도 계열의 반격을 막으려면 국민의 지지와 성원 뒤따라야
위 논문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문무왕이 나당전쟁 승리를 위해 국론을 통일할 목적으로 안압지라는 상징적 시설을 조영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할 것이다. 안압지에 용이 출현했다는 점, 그 용이 출현할 당시의 미추왕이 신라인들에게 호국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활용하여 안압지라는 시설을 조영함으로써 신라인들의 국론을 통일하고 또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려고 했다고 분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안압지에서 연회가 몇 번 열리기는 했지만 연회가 열린 사실만을 갖고 이 시설을 연회 장소라고 보는 것은 좀 터무니없는 발상일 것이다. 그럼, 엄연한 호국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안압지가 일개 ‘유흥시설’로 전락된 데에는 어떤 함의가 담겨 있을까? 이 문제는 일제시대 이래 한국 역사에서 대(對)중국 사대관계, 붕당정치의 폐해, 나약한 민족성 등이 강조된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실제의 사대관계나 붕당정치는 이병도(1896∼1989년) 계열의 식민사관주의자들이 주장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사대관계는 동아시아 특유의 차별적 국제관계의 표현일 뿐이며, 붕당정치는 건전한 정당정치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인 1919년에 일본의 모 대학을 졸업하고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그를 따르는 식민사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한국 역사는 나약하고 또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묘사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식민사관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안압지 역시 사치스러운 귀족문화로 묘사되는 것이 자신들의 논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신라 귀족들의 사치 풍조를 강조함으로써 한민족은 본래 남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한심한 족속’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인들이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최강인 당나라에 맞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그런 시설을 조영했다고 하면, 이는 자신들의 논리를 거스르는 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이병도식의 안압지론(論)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물론 학교 교과서에 안압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안압지에 대한 종래의 교과서 기술이 ‘조용히’ 삭제된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식민사관이 한국에서 서서히 힘을 잃어 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식민사관이 서서히 극복되고는 있지만 한국사에는 아직도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적어도 역사 교과서만 놓고 볼 때, 개선되어야 할 부분들이 아직은 많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한국사 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
젊고 양심적인 학자들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학문적 소신에 따라 한국사의 참모습을 구성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이 없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학자들이 이병도 계열의 반격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와 시대를 위해서 올바른 역사를 규명하는 데에 전념하려면 일반 국민들이 그러한 역사학자들을 지지하고 성원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