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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빈치
"사진 작업을 하지 못한 5년 동안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곳은 둔지붕 주변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련 속에서도 내가 한라산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둔지붕이 있어서였다. 내 영혼을 사로잡아 섬에 홀리게 만든 마력이 이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설렘으로 봄을, 여름을, 그리고 가을을 기다린다.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나를 설레게 한다.-책 속에서

불치병으로 투병을 하는 중에 가장 그리운 곳은 둔지붕 주변이라는 고백에 사진에 홀려 무심코 넘겨 나가던 손을 멈추었다. 작가의 뼈아픈 그리움을 통하여 만나는 둔지오름. 사진집 <1957~2005 김영갑>에는 둔지오름과 수많은 제주 오름의 사진이 평화롭게 누워 있다.

원시오름에서 부르는 삶의 찬가

둔지오름은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수많은 오름 중 하나다. 화산이 폭발할 때마다 생긴 기생화산을 제주도에서는 ‘오름’이라고 한다. 오름은 수많은 화산재가 쌓여 이루어졌기에 수많은 오름 그 가운데 분화구, 즉 한라산의 백록담이 있다.

한라산을 이루고 있는 오름 360여개. 오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은 제주도의 동부와 서부에 넓게 펼쳐진 초원지대로 이곳은 목초지만이 아니라 밭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제주도의 속살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라고 작가는 적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의 정체성을 말할 때 둔지오름 주변을 첫 번째로 꼽는다고 글에 밝히고 있다.

“…둔지오름을 가장 사랑한다. 중산간 들녘 중에서 이곳을 첫째로 꼽는 것은 둔지오름 때문만은 아니다. 오름의 아름다움을 나열한다면 둔지오름은 오히려 끝부분에 자리한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것은 농부들이다. 이들이 있기에 철따라 아름다움이 달라진다. 나는 제주에서의 20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둔지붕 일대는 사람을 자연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묘한 힘이 배어나온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곳을 산책한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편안한 상태에서 걸어 본다.”-책 속에서

ⓒ 두모악갤러리
ⓒ 두모악갤러리
내가 사진에 붙잡아 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구름,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김영갑
내가 사진에 붙잡아 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구름,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김영갑 ⓒ 두모악갤러리
수많은 오름이 분포하는 한라산과 해안과의 그 사이 해발 200~600미터의 중산간 지역… 사진작가 김영갑의 사진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이다.

농부들의 소중한 땀과 땀의 결실이 있어서 더 아름다운 원시오름에서 부르는 삶의 찬가. 고인의 둔지오름을 향한 뼈아픈 그리움과 책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오름을 통하여 전혀 모르고 있던 제주의 오름들을 맘껏 만날 수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사진, 바람에 실려 간 영혼

“오늘도 흔들린다. 구름이 흐르는 대로 흔들린다. 맑은 날은 빠르게, 흐린 날은 더디게, 구름 따라 흔들린다. 어떤 구름이 몰려오느냐에 따라 긴박할 수도 있고, 느긋할 수도 있기에 사람들은 구름에 따라 울고 웃는다. 죽음을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언제까지나 당당하게 싸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동안 구름이 내게 가르쳐 준 처방이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지낸다. 자리에 누워 내 마음 속에 흐르는 구름을 바라본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면서 한 걸음 내딛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다. 어느 날인가 태풍 루게릭을 몰고온 먹장구름이 서서히 물러나길 의연히 기다리리라.-책 속에서


사진집 <1957~2005, 김영갑>은 지난 해 삶을 마감한 고 김영갑의 1주기를 추모하는 책이다. 사진과 제주도에 매혹되어 1985년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인의 제주에서의 20년 사진생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사진집이다.

ⓒ 두모악갤러리
1957년생 김영갑은 희귀병인 루게릭으로 6년 동안 투병하다가 2005년 5월 29일에 삶을 마쳤다. 그의 육신을 태운 재는 투병 중에 손수 가꾸었던 두모악 갤러리와, 두모악 갤러리 뒤란에 심어두고 애인처럼 아꼈던 감나무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 사진집 끝을 마무리하고 있는 글이다. 수목장. 육신의 흔적을 태운 재는 감나무의 양분이 되고 영혼은 감나무에 깃들어 오늘도 제주의 오름과 바람, 구름을 맘껏 호흡하리라. 제주에 가면 꼭 한번 만나고 싶은 감나무다.

사진집 <1957~2005 김영갑>을 통하여 만날 수 있는 것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닌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이다. 들판의 바람과 구름, 안개, 초원의 나무와 갈대와 야생화, 중산간 지역 여기저기에 봉긋봉긋 솟아오른 수많은 오름들,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황홀한 순간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사진들은 발표된 적이 전혀 없는 미공개 사진과 다른 사진집이나 단행본 등에 발표한 사진들 일부. 고인이 파노라마 사진을 시작한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찍은 사진들이다. 이 파노라마 사진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한 장의 사진을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하고 있는데 그 크기가 60여cm여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만족감이 훨씬 클 법하다.

파노라마 사진 틈틈이 투병중의 작가가 지나온 삶도 회상하고 있다. 사진과 제주에 매혹되어 살아온 지난 20년 동안 사진에 무엇을 담고 싶었는지, 그간 무엇을 가장 사랑하였는지, 6년 동안의 투병중의 심경 등 김영갑의 사진세계, 삶과 가치관 등을 잘 알 수 있는 글들이다. 사진과는 별개로 글만 읽어도 한편의 진솔한 에세이를 보는 듯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장대함과 고인의 회상에 맘껏 빠져들었던 사진집 <1957~2005 김영갑>. 누군가 김영갑을 묻는다면, 그간 나왔던 고인의 저서 <마라도>, <삽시간에 붙잡힌 한라산의 황홀>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숲속의 사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모두 제쳐두고 단연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1957~2005, 김영갑>
김영갑 사진, 김영갑 글/다빈치 2006 5월 15일/4만5000원


김영갑 1957-2005 - Kim Young Gap, Photography, and Jejudo

김영갑 사진.글, 다빈치(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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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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