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의 형제들의 능력을 보면 분명했다. 그런 풍철한이 형제를 삼고자 하는 자이니 필시 범상한 자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어 유심히 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이한 점은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음울한 눈빛과 황량한 벌판에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늑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림에 저런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기껏 십수 년 고련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되지도 않는 야심과 피해의식으로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자들이 대개 저런 부류였다. 옥기룡은 좀 더 알아보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의외라 생각한 것은 옥기룡 뿐이 아니었다. 정작 반효나 설중행 본인은 내심 매우 놀라고 있었다. 풍철한이 농을 하기로 유명하긴 하나 형제들 일에 농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였다. 문 옆에서 술에 전 듯한 냄새를 풍기며 뚱뚱하고 키가 작은 인물이 불쑥 모습을 보였다. 그는 급히 달려왔는지 크게 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숙취로 인한 입 내음이 주위 사람들을 역겹게 했다. 사내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머리통은 남들보다 훨씬 커 키가 자랄 것이 머리만 큰 것 같았다. 더구나 의복 이곳저곳에는 얼룩이 묻어있었는데 아마 술을 먹다 흘린 것 같았다. 눈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게슴츠레해 모양새가 영 보기 좋지 않았다.

"쯧... 너는 어찌 이런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단 말이냐!"

옥기룡의 말은 나직했지만 사내를 꾸짖는 태도가 매우 추상같았다. 하지만 모습을 보인 사내는 옥기룡의 꾸지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히쭉 웃더니 대충 풍철한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모가두(摸暇頭)외다. 따라오시오."

풍철한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자신만큼이나 괴물이라고 들었던 자였다. 운중보주의 셋째제자이며 와룡장(臥龍掌)이란 외호를 가진 자다. 다른 제자들과 외모부터 다른 이 자는 다섯 제자 중에 가장 뒤처진다는 인물로 어떻게 보주의 제자가 되었는지 의심스럽다고 소문난 인물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시골 촌구석의 촌부(村夫)같은 모습이었다.

"일행이 셋뿐이오?"

말투도 무척 퉁명스러웠다. 마치 이렇게 안내하러 나온 것이 매우 귀찮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설중행을 보는 눈에서는 아주 잠깐이나마 기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어서 마주보고 있던 설중행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왜 셋뿐이어서 불만인가?"

풍철한이 시비조로 토를 달자 모가두는 큰 머리통을 빠르게 흔들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꽤 불안정했다. 술이 덜 깨기도 했지만 만사를 귀찮아하는 그의 성품 탓인 것도 같았다.

"아니오... 천만에... 감히 풍대협께 불만을 가질 수 있겠소?"

이제야 상대가 누군지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자신이 안내해야 하는 인물이 중원에서 미치광이라 소문난 광검 풍철한이란 사실을 깨닫자 그는 더 이상 입을 닫아걸고는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말을 해보았자 손해나는 쪽은 자신이었다. 계단을 오르자 앙 옆에 도열해 있는 인물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기이한 것이 계단을 올라갈수록 도열해 있는 인물들의 나이가 적어지기 시작해서 계단이 끝날 즈음에는 열 살이 못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도열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절도 있는 자세나 태도는 결코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문파나 세가에서 운중보로 보내진 아이들이었다.

무림에 몸담고 있는 문파(門派)나 세가(世家)라면 그 후계를 잇는 자식을 운중보로 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자파의 기초공부가 끝나는 일곱 살에서 열 살 사이에 어떤 방법이던 운중보로 보내고자 했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운중보에서 십년을 지내고 자파로 돌아 온 자식들은 감탄을 할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다.

아이들은 삼년에 한 번 중원 전역에서 보내 온 아이들 중에 선발되었다. 선발되었다는 자체가 가문의 영광일 정도로 그 경쟁은 치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운중보주는 물론 운중보에 있는 인물들의 면면이 이미 중원 절대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자식이 반드시 보주의 눈에 들지 않더라도 그들 중 한 인물의 눈에라도 차게 되면 그 문파나 세가는 당장에라도 그 지역의 패자(覇者)로 발 돋음 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희망이었다. 또한 실제 그런 문파나 세가가 한 둘 생기다 보니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더구나 동문수학한 같은 또래들은 그들끼리 연수해 하나의 세력을 만드니 안전한 울타리를 또 하나 만드는 일도 되었다.

보주의 다섯 제자들 역시 그렇게 입문하여 보주의 눈에 띠어 사부로 모시게 되는 영광을 안은 터였다. 보주의 제자가 된 것만으로 그들은 중원 최고의 기재로 입증 받은 셈이 되었다.

백팔제가 끝나자 그 우측에는 집 채 만한 바위가 서 있었고, 거기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면철비(免鐵碑)>

소림을 비롯하여 육파일방(六派一幇)이 선두에 서서 서명하여 올리고, 무림에 몸담고 있는 문파나 세가들이 앞 다투어 운중보주를 위해 세운 면철비는 백팔제와 더불어 운중보주가 중원 무림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내 주는 징표였다.

화강암을 매끄럽게 베어낸 뒤 쇳물을 붓고 그 위에 금을 씌어 만든 면철비는 보주가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었다 해도 한번 만은 무림 전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죄를 사하게 해준다는 의미였다.

'십 이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군.'

설중행은 고소(苦笑)를 흘리고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열세 살에 쫓겨나던 그 때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변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래도 옥기룡조차 나를 알아보지 않아 다행이군.'

열세 살의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직 애 티를 벗지 못한 나이. 그 뒤로 떠나 십 이년이 흘렀다하나 웬만하면 알아볼 만도 할 것이었다. 더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품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옛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품성이 변했을 뿐 아니라 외모마저 전혀 다르게 변해버렸다. 그는 본래 통통하고 살이 찐 편이었다. 피부도 여인같이 희고 매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메마르고 거칠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다.

게으르다고 욕을 먹을 정도로 부드럽고 느긋했던 그의 성격은 옥기룡이 느끼는 것과 같이 황량하고 음울하게 변했으니 누구라도 금방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 외모 뿐 아니라 성격도 변하기 마련.

'다들 몰라보게 변했어. 헌데 그렇게 성실했던 모가두(摸暇頭) 사형이 왜 저리 변했을까?'

그는 앞에서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떼고 있는 모가두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변했지만 모가두 역시 밖에서 무심코 지나치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언제나 둥근 눈으로 바보라 할 정도로 웃고 있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고, 그의 턱에는 귀밑서부터 길게 검상이 나 있었다.

흐트러진 걸음걸이하며 숨을 쉴 때마다 풍겨오는 숙취 냄새. 애초부터 외모나 자질 면에서 보주의 제자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평을 들었던 모가두였다. 하지만 그는 매사에 열심이었고, 성실했다. 검을 익히기엔 체격조건이 맞지 않아 보주의 제자 중 유일하게 장법(掌法)에 매달렸던 그였다. 지금의 모습은 과거에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점점 사형제 중에서 처지고 있는 자신을 탓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가두가 안내한 곳은 매우 의외라고 생각할만한 곳이었다. 운중보의 내막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경악할 일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