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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내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끝내 '광복절 아침'에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말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15일 오전 7시 40분쯤, 지난해 참배 때와는 달리 연미복 차림으로 본전(本殿)에서 참배를 실시했다. 지난해 10월에 비해 한 단계 격상된 형식을 취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 측은 사적인 참배임을 강조했지만, 그간 총리관저의 준비 과정이나 참배 형식과 국내외적 관심을 볼 때 이를 총리의 공식적 참배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가 현직 총리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한 이래, 일본 총리가 패전기념일(일본측 표현은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에 참배를 한 것은 나카소네 전 총리에 이어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고이즈미 총리의 입장에서는 이번 참배가 자신의 재임 중 6번째 참배인 동시에 첫 8·15 참배가 된다.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이로써 2001년 4월 자민당 총재선거 당시의 8·15 참배 공약을 이행한 것이 된다. 어느 정도는 객관적 요인도 작용했지만, 이번 일의 상당 부분은 고이즈미 총리 개인의 소신과 신념의 산물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이즈미가 8·15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한 이유
총리의 8·15 참배로 인해 일본은 앞으로 한동안 한·중 양국과의 외교적 난관을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 국제사회의 진정한 관심사는 그것이 아닐 것이다. 참배 이후 어느 정도의 외교적 마찰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상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대체 고이즈미 총리가 엄청난 국내외적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8·15 참배를 강행한 배경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까지 나타난 객관적 상황으로 볼 때, 고이즈미 총리가 결단을 내리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4가지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의 총재선거 불출마 의사 표명이다. 아베 신조 관방장관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였던 후쿠다 전 장관이 중도에 포기함에 따라 고이즈미 총리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아베 장관의 당선이 확실하게 되었다는 판단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지난 7월말 후쿠다 전 장관이 불출마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면, 이번처럼 고이즈미 총리가 8·15 참배를 강행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기 총재 선거를 불과 1달여 앞둔 상황에서 야스쿠니 문제가 불거지고 또 그로 인해 일본의 대외관계가 악화되면, 온건한 아시아 외교론자인 후쿠다 전 장관에게 유권자들의 지지가 쏠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지난해 10월만 해도 2%에 불과하던 후쿠다 지지율이 야스쿠니 쟁점화를 계기로 올 3월부터 20%대까지 올랐던 것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쿠다 전 장관이 중도 포기한 지금 상황에서는 설령 야스쿠니 문제가 격화되더라도 아베 장관의 독주 체제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고이즈미 총리의 결심에 힘을 실어 준 것으로 보인다.
참배 관련 중국의 '강한' 어필이 없었다
둘째, 중국의 미온적 태도다. 이번 8·15 참배를 앞두고 중국측은 공식적으로는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영국의 <로이터통신>도 8월 13일자 베이징 발(發) 보도에서, 중국이 한편으로는 일본을 비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통신이 언급한 '실용주의적 입장'이라는 것은, 중국이 일본과의 무역관계 때문에 내심으로는 야스쿠니 참배를 그리 강하게 반대하지 않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통신은 또 중국 정부는 정작 야스쿠니 참배보다도 야스쿠니 비판을 계기로 한 중국 내 민족주의의 격화를 더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통신은 올해 초부터 중·일 양국 간의 고위층 간에 지속적인 접촉과 절충이 있었다는 점도 보도했다.
그동안 야스쿠니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해 온 중국이 이번에는 그리 강한 어필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고이즈미 총리의 결정에 힘을 실어 주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미국의 사실상의 묵인이다. 미국은 그동안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해 왔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16일 미일정상회담 때도 고이즈미 총리에게 참배와 관련한 자제를 촉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도 미국 정가에서는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미국은 고이즈미 총리의 8·15 문제와 관련하여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 문제를 사실상 묵인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묵인이 '참배'에 힘을 실어줘
이 같은 미국의 사실상의 묵인은 중국의 미온적 태도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미국이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실제 이유는 야스쿠니 참배로 인해 자칫 중일관계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이 이번 사안을 앞두고 미온적 태도를 보임에 따라, 미국 역시 굳이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미국이 신중한 입장을 주문했다면 고이즈미 총리로서도 8·15 참배를 강행하기 힘들었겠지만, 미국이 사실상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고 중국도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상황에서 한국 정계의 반대만으로는 고이즈미 총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차기 총리에 대한 고이즈미 총리의 영향력 행사 의도다. 고이즈미 총리는 후쿠다 전 장관의 중도 포기로 자신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아베 장관의 총재 및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는 상황 속에서, 아베 장관에게 자신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 총리는 퇴임을 1달여 앞둔 상황에서 8·15 참배를 기어코 강행함으로써 후임 총리 후보인 아베 장관에게 일종의 본보기를 보여 준 것이다. 이는 아베 장관에게도 야스쿠니의 굴레를 씌워 놓기 위한 의도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고이즈미 총리가 자신의 퇴임 이후에도 계속해서 '아베 총리대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를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베, 임기 내내 야스쿠니 굴레 벗어나기 힘들어
고이즈미 총리가 국내외적 반대를 무릅쓰고 8·15 참배를 강행한 데는 대체로 위와 같은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 선거 구도가 이미 아베 독주체제로 굳혀져 있고 또 미·중 양국이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정부의 힘만으로는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를 제어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카소네 전 총리에 이어 사상 두 번째인 현직 총리의 8·15 야스쿠니 참배로 인해 한일관계 및 중일관계는 앞으로 일정한 냉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중국 등의 태도로 볼 때에 이러한 외교적 냉각이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야스쿠니 문제는 계속 쟁점으로 남아 있겠지만, 한·중 양국 정부의 대일 외교관계는 일정한 냉각기를 거치면 다시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참배로 인해 아베 장관은 임기 내내 야스쿠니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총리 및 국왕(소위 '천황')의 야스쿠니 참배를 관철함으로써 군국주의적 재무장을 추진하고자 하는 일본 우익과, 그런 일본 우익을 견제하려는 주변국들의 줄다리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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