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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지는…?"
신태감은 말을 하다 멈췄다. 그 종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비급(秘級) 종지라면 이미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비급 종지는 보는 즉시 없애게 되어 있었다.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신태감의 얼굴에는 불안감과 당혹감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절대 있어서도 안 될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서교민을 닦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당두 위치에 있는 그가 종지의 진위 정도를 구별하지 못할 리가 없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이지?"
신태감은 나직하게 뇌까렸다. 이 일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자신의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중대한 일이었다. 그는 일단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하여 심호흡을 했다. 둔기로 뒷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멍했지만 이 사태를 차분하게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명령은 모두 자신의 손을 거쳤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헌데 이번 일은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하고 비영조에 명령을 내릴 사람은 현 황상을 등에 업고 한 손에 천하를 쥐고 흔드는 위충현 태부어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추산관(萩㦃寬) 태감어른 밖에 없다. 하지만 추태감도 자신과 상의 없이 그런 명령은 내릴 이유는 없었다.
'종지를 누군가가 위조했다?'
가능성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있어서는 안 될 중대한 일이었다. 서교민은 분명 착자와 필체, 그리고 음호까지 몇 번이고 확인했을 것이다. 만약 종지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었다면 자신에게 재차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지는 완벽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종지를 건네는 장소까지 알았다면 그 누군가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의 움직임은 아무도 몰라야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움직여 온 일이 세상에 흘러나가면 아무리 동창(東廠)이라도 세간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큰일 났군.'
그는 밀려오는 불안감에 서교민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신태감의 태도에서 심각함을 느꼈는지 침중한 표정이었다.
"혈간을 죽이라는 말은 비영조에게 자살하라는 말하고 같잖아? 그게 말이나 돼?"
"……!"
군문과 같이 명령에 죽고 사는 게 동창에 소속된 인물들의 운명이다. 말이 안 되는 명령이라도 따라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동창 내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비영조라면 더욱 당연하다. 오히려 명령에 토를 달거나 의문을 제기하면 불편해하는 것이 윗사람들이다. 그런데 명령을 내려놓고 그것을 이행했는데 이제 와서 그게 말이 되냐고 물어보면 어쩌란 말인가?
"그래 결과가 어찌된 거야?"
"아직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 자가 이곳에 모습을 보였음은 성공했다는 의미입니다."
어차피 비영조는 명령에 죽고 사는 존재들이다. 명령을 수행하던지 아니면 죽는 길밖에는 없다. 그들 중 누군가가 살아 있음은 이미 명령을 완벽히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말이 돼? 비영조 열여덟 명이 혈간을 죽일 능력이 있는 거야? 더구나 혈간 혼자 움직인 것도 아닐 테고…."
서교민 역시 이 명령을 내릴 때 생각 못한 것도 아니었다. 비영조가 아무리 일급살수로서의 능력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었고,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을 거치면서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정말 의외였고,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방조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로는 이제 비영조를 정리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이미 위충현은 완벽하게 권력을 틀어쥐었고, 이제는 비영조 같은 존재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사라질 존재들이었고 처음 조직할 때 마흔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사개조가 불과 열여덟 명의 이개조로 줄어들었지만 인원을 더 이상 보충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즉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한 것은 서교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신태감이 손을 저었다.
"아니야… 지금은 눈이 많아… 오늘 오후에 경후(卿珝)가 이곳에 도착할거야. 그와 함께 알아보도록 해."
경후는 동창 최고의 지위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첩형(貼刑) 중 한 명인 자. 중원 곳곳에 눈을 가지고 동창의 일을 막후에서 조종한다고 알려진 실세다.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특별한 경우에 언뜻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자였다. 헌데 그런 자가 대체 무슨 일로 이곳 운중보에 들어온다는 것일까?
"알겠습니다."
서교민은 혼란스런 마음을 감추며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는 그 방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태감이 문이 닫히자 나직하게 탄식을 불어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 철담(鐵錟) 하후진(夏候振)에 이어 혈간 옥청천까지 문제가 생긴 것일까? 이거 미칠 노릇이군.'
그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까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그가 받은 충격은 컸다.
12.
운중검(雲中劍) 나군백(羅君白)
이미 사람들은 그의 명호나 이름을 부르지 않은지 오래된 탓에 누군가 물어 보면 선뜻 대답하기도 어려운 명호요, 이름이었다. 그는 이전에 많은 명호로 불렸지만 이제는 그저 운중보주였다. 그것으로 사실 그만이었다. 운중보의 보주는 곧 천하제일인이었다. 운중보는 천하제일의 문파였다.
보주는 스물셋의 나이로 무림에 모습을 나타낸 이후 서른넷에 무림을 평정한 후, 그 다음해부터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최고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고, 또한 그 위명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림을 종횡했던 군웅들이 스스로 몸을 낮춰 그의 수하되기를 자청한 인물들이 하나의 문파를 이루어 모시기를 이십오 년.
물론 그 혼자서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와 버금가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와 그 친구들을 합쳐 세간에서 동정오우(洞庭五友)라 부르는 그 이름들은 현존하는 최고고수 다섯 명을 가리키는 말도 되었다.
운중보는 무림의 대소사에 끼어드는 것을 극히 자제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이하게도 무림의 대소사가 모두 운중보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문파와 세가의 자제들이 운중보에 들어와 수학하고 나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무림은 은연중 운중보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
보주는 구척장신의 뿔이 난 괴물도 아니었고,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고압적인 위엄도 가지지 않은 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정말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는 운중보주가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약간 작은 듯한 몸집에 젊은 시절에는 꽤 호남이라고 보일 정도의 얼굴.
나이에 비해 조금 젊어 보인다는 것 정도가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었다. 그는 기다란 탁자 끝에 하나의 크고 널따란 교의(交椅)에 앉아 있었다. 교의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였다. 그 기다란 탁자 옆에는 꽤 많은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보주의 다섯 제자들도 뿐 아니라 배에서 보았던 인물들의 모습도 보였다.
"대사께서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겠소이다."
목소리는 조용하고 나직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목소리는 기다란 탁자 끝에 앉아 있는 사람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보주가 바라보는 사람은 소림의 각원선사(覺元禪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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