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달 무덤에서나마 선생님을 뵈었던 손현희 입니다.
<우리문장쓰기>를 읽고 선생님을 알고 난 뒤, 벌써 몇 해가 흘렀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살겠다고 다짐하며 나름대로 애쓰며 살았지만 늘 모자라고 어설프기만 합니다.
처음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그때가 떠오릅니다. 남편이 먼저 선생님 책을 읽고 내게 건네주면서 “글쟁이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하고 말할 때 흔하게 볼 수 있는 ‘시 강의’나 ‘글쓰기 이론’인줄만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게 알게 모르게 물들어있는 ‘유식병’을 고칠 수 있는 소중한 ‘보약’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그동안 썼던 글을 돌아보면서 매우 부끄러워 남편과 저는 둘이 서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낯이 뜨겁고 화끈거렸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은유’가 시의 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아름답게 꾸미려고만 했고,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싸한 글을 써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써온 글쓰기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서도 오랫동안 써 오던 버릇이 있어 쉽게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선생님이 쓰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 말’을 바르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애를 썼지만 사실 아득하기만 할 뿐 어떻게 해야 가장 올바르게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읽은 책이 바로 <우리말 살려쓰기> 였습니다. 세 권을 다 읽으면서 그제야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 삶에 깊이 뿌리 박힌 한자말과 일본 말투로 쓰는 낱말을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하나 바꿔 쓰는 버릇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가 쓴 글을 하나하나 고쳐나갔지요. 글을 고치면서 더욱 낯이 뜨거웠습니다. 한 번 고치고, 며칠 지나 다시 읽어보면 또 고칠 곳이 나와서 몇 번이고 다시 고쳐야만 했습니다.
또, 선생님이 쓰신 책 가운데 ‘바로잡은 낱말모음’을 하나하나 옮겨 적었습니다. 바꿔 쓸 낱말이 워낙 많아서 꽤 오랫동안 옮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한자말과 일본 말투로 된 낱말을 바꾸어, 예쁘고 살가운 ‘우리 말’ 로 고쳐 익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저와 남편이 함께 꾸리는 누리집에서 선생님이 쓰신 글을 올려놓고, 우리말을 살리려고 애쓰신 선생님의 뜻을 알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퍽 다행인 건 ‘우리 말’에 마음을 쓰면서 ‘최종규’선생을 알게 된 겁니다. 이런저런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선생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가장 올곧게 받들며 꿋꿋하게 ‘우리 말 살리는 운동’을 하는 최 선생 덕분에 저희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말을 살리자’라는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매우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최 선생이 갈무리해놓은 글을 읽고 이야기하면 쉽게 풀렸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툭 던지듯 건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을 열고 ‘우리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눈물이 날만큼 기쁘고 퍽 즐거웠습니다.
그리운 이오덕 선생님!
선생님을 알고 나서 가장 서운하고 마음 아팠던 일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오덕’ 이란 이름도 몰랐다는 거였고, 이렇게 훌륭한 분이 우리가 알기 바로 한 해 앞서 돌아가셨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살아 계신다면 가서 얼굴 뵙고 귀한 말씀도 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서운했습니다.
지난달에서야 선생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동안 사는 일에 부대끼다 보니 너무 늦었지요. 무너미마을에 들어서면서 마치 고향에 간 것처럼 기쁘고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우리 부부와 선생님이 가르치신 ‘우리 말’에 마음 쓰며 살아가는 글동무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최 선생에게 길 안내를 받으면서 선생님 무덤까지 오르는데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그토록 사랑했던 풀과 나무, 그리고 넓은 우리에서 살고 있는 짐승들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모릅니다.
무덤 둘레에 선생님이 쓰셨던 책이름이 하나하나 돌에 새겨있는 걸보고 퍽 반가웠습니다. 우리 셋이 선생님께 인사를 올리고 일어섰는데 그만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울고 말았습니다. 쌓여 있던 그리움과 선생님이 온 삶을 바쳐 이루고자 했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 것들 때문에 가슴 아팠던 서러움이 밀려왔기 때문일까요?
선생님이 계신 무덤에서 머무르는 동안 최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며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 어떠한 반대에 부딪혀도 내가 서있는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우리 말’ 살리는 일을 알리고, 바로잡는데 삶을 바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보고 싶은 선생님!
어제(8월 25일)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세 해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글방과 기사에서 선생님의 뜻을 새기자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또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무너미 마을까지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멀리서라도 선생님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하늘도 제 마음을 알았는지 비가 내렸습니다.
선생님, 아직은 멀고 힘든 길이겠지요?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우리 겨레를 살리고, 우리 얼을 되찾는 참된 ‘우리 말’에 마음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요. 더구나 이런 사람이 제 둘레에서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는 게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 몰라요. 선생님 책을 많이 읽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떠나서 한 줄을 읽어도 그걸 마음에 새기고 자기 삶에 채운다면 더욱 값진 일이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마 선생님께서도 가장 바라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 사람 앞일은 누구도 모르지만 선생님이 하셨던 그 일을 언제까지나 제 힘껏 따르겠습니다. 늘 지켜봐 주시고요. 잘못하는 게 있으면 어떤 쪽으로든 깨우치게 해 주세요. 다음에 선생님 무덤에 찾아갈 때는 더욱 좋은 소식을 안고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셔요.
2006년 8월 26일
들풀처럼 낮고 하찮은 손현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