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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상식> 겉그림.
<첩첩상식> 겉그림. ⓒ 새움
'상식'이란 단어가 쓰인 포장물 속에는 '지식을 위한 상식'이 가득하다. 그야말로 줄치면서 읽고, 외워야 하는 단어의 의미들이 나열돼 있다. 그에 비하면 진중권의 <첩첩상식>은 읽고, 외울 필요가 없다. 상식 통하는 사회를 위한 상식들만 모아놨기 때문. 한마디로 '상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맡고 있다.

<첩첩상식>은 진중권이 사회를 봤던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내보냈던 '오프닝·클로징 멘트'들을 161개의 키워드로 정리한 것이다. 키워드는 가나다순으로 구성했는데 이건 편의를 위한 것에 불과할 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유인즉 특정이름이나 특정명칭이 아닌 경우에는 '비꼼'을 위한 것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가령 '멸치(051028)'라는 키워드를 보자. 멸치가 상식과 만나면 무엇으로 통할까? 여기서 멸치는 후방 지역의 한 여단장 공관에 근무하던 병사가 폭행당한 것과 관련됐다. 진중권의 말을 들어보자.

전장에서 공포감을 느껴 총 들기를 거부하다가 맞은 것도 아니고, 병사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이유라는 게 재미있네요. 여단장님 가족이 드신 멸치를 잘못 보관했기 때문이라나요?

장군님들 눈에는 남의 집 귀한 자식, 국방의 의무를 하는 병사가 '멸치만도 못한 존재'로 보이나 봅니다. - '책' 속에서


비슷한 예로 키워드를 하나 더 살펴보자. '야수파(060224)'다. 진중권이 야수파를 말한다면, 으레 미술사를 떠올리겠지만 틀렸다. 여기서 야수파는 그것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전여옥 의원이 “기업에서 걷은 돈 5천억원을 김정일 개인계좌로 줬고, 김정일이 공항에서 껴안아주니까 치매 든 노인처럼 얼어서 서 있다가 합의한 게 6.15 선언 아니냐”라고 했던 발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야수파는 어떻게 전여옥과 연결되는가? 이것도 직접 살펴보자.

마침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프랑스 야수파 전시회를 하고 있다던데, 전 의원님이 혹시 그 전시회를 둘러보고 엉뚱한 영감을 받으신 걸까요? 아니면 야당이라서 야성이 남달리 발달해서 그런 걸까요? 전 의원, '으르렁' 원색적 욕설을 뱉어내는 언어의 야수파가 되셨네요. - '책' 속에서

대다수의 키워드가 이런 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런 만큼 원하는 상식에 따라 책 중간을 펼치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버리는 것이 낫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정면 돌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어느 책이든 그렇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진중권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떠올린다면, 특히 이전에 발표된 책들을 살펴본다면 믿어도 좋겠지만 무대가 무대인만큼 이름만 놓고 믿을 수는 없는 처지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방송에서 '우아'한 척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걱정이 드는 것일 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기우에 불과하다. 왜 그럴까?

방송이라는 무대인만큼 예전과 같은 '독설'은 없다. 때문에 처음에는 약간 당황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설을 대신한 풍자와 가벼운 냉소가 그 자리를 채우고도 남는다. 군더더기 없이, 할말 안할 말을 콕콕 찍어내는 솜씨는 쉬이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권자수 7천2백명에 불과한 이 섬에서 3백억원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면, 재앙이겠지요. 3년 연속 태풍 피해를 입은 울릉도가 방치된 것은, 읍면의 경우 6백억원 이상의 피해가 나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태풍의 피해를 입었는데, 정작 지원은 울릉도가 아니라 뉴올리언즈로 간다는 것은 뭔가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툭하면 '민생' 타령하던 여야 정치권.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 책의 '지원(050919)' 중

회사는 회장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것입니다. 제대로 된 회사라면 회장 한 사람이 유고라 하더라도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일, 회장님 없이는 기업이 무너진다면, 그룹 회장님들이 노환으로 돌아가시는 날엔 회사 전체를 회장님과 더불어 순장을 해야 되겠네요. - 책의 '순장(060427)' 중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 때문에, 책이 소위 '편향'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수 있는데 겉보기에는 그렇다. 진중권과 어울리지 않는 정당이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꺼리는 아니다. 정치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고집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걱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정치적 성향에 관한 것이라면.

시기상 다루는 것들은 지나간 것들이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작년의 것만 해도 올해도 해당되기 때문. 한발 더 나가자면 내년에도 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쳐지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키워드의 마지막인 '황우석'에 관한 것만 봐도 그렇다. 사건은 지나갔지만, 진중권이 말하는 것은 오늘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내일이라도 반복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만큼 핵심을 파고들고 있다는 말이니 유효기간 때문에 망설일 이유는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알라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첩첩 상식 - 진중권의 시사 키워드 사전

진중권 지음, 새움(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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