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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를 만든 길
추억은 미래를 만든 길 ⓒ 이성재
쌀집은 큰 방이 두 개였는데 중간은 미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한 이불을 여럿이서 덮고 자는 그 틈에 들어가야 했다. 지금 좋은 기억만 남은 것을 보니 당시 나를 혼내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어릴 적 상처는 큰 후에도 남는데 난 즐거운 기억만 있다. 혹 이 글을 읽는 쌀집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르신들은 돌아가셨을 것 같다.

봉순이 오빠는 봉학이였다. 나에게는 봉학이 형이다. 그 형은 자그마한 키였지만 단단한 체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보디가드였다. 항상 나를 보호하고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은 쌀을 퍼다가 아이스크림과 바꿔 먹었던 기억도 있다.

봉학이 형 위로 누나가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에 없다. 다만 나와 다른 동생들을 목욕시켜 주고 따뜻하게 챙겨 주었다. 그래서 어릴 적에 "난 누나가 왜 없지?"라면 부러워했었다. 어머니가 내 위로 4남매를 잃지 않았다면 내 부러움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내 나이 44세이니 큰 누님이 살아계신다면 56세쯤 되셨을 것이다. 쌍둥이 형제도 있었다니 재미있게 살았을 것 같다.

사실 외아들은 외롭다. 늦게 여동생을 두었지만. 형제 많은 집안은 외아들의 우상이다. 형제가 많으면 자라면서 서로 다투어도 크고 나면 모두 재산이다. 고등학교 때 부러웠던 친구는 자기 매형에게서 용돈을 받아쓰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들을 참 좋아한다. 우연찮게 연결되었더라도 난 그 사람을 내가 먼저 잊지 않는다. 10대와 20대에는 때론 이런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 상처의 돌멩이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 내가 기대치가 큰 것이겠지만. 지금은 두루뭉술하게 되어서 웬만한 것으로 상처를 입는 다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사람이 좋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게 만든 팔남매 쌀집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형제 없이 외롭게 커야 했던 나에게 훈훈함과 사람냄새를 알게 한 곳이다. 돌이켜보니 얼마나 좋은 경험이었는지, 내 인격과 성격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면 일을 하는 성격은 그때 만들어진 것 같다.

내 마음의 고향 '여덟 남매 쌀집' 같은 훈훈함이 지금 이 사회에 있었으면 좋겠다. 냄새나는 이불을 덮고 있어도 행복하고, 간지럼을 피면서 서로 웃고, 발을 서로 비벼가며 잠을 자는 그런 사회 말이다. 서로 입장을 바꿔보고, 상처 주는 말을 무책임하게 쉽게 하지 말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의 가치를 최고로 아는 그런 사회 말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입장이 바뀌는 법이니까.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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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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