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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곡은 처음으로 아주 밝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풍철한을 비웃고자 웃은 것은 아니었다. 답답함을 떨쳐버리려 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었다.
"빌어먹을… 말 따위 하고는…."
그럼에도 풍철한이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리자 함곡이 웃음을 거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아마 우리 두 사람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보주는 서슴없이 자네를 선택했을 걸세."
"왜?"
"보주도 말했잖은가? 직감.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네의 그 허황된 환시능력(幻視能力)말일세. 그것이 필요했겠지."
"어차피 자네 말대로 허황되지 않은가? 그것으로 인해 나는 자네의 동생에게 두 번이나 뺨을 맞아야 했네."
"그게 왜 그 아이 탓인가? 여하튼… 그래 자네의 그 허황된 환시에는 누가 보이던가?"
"보주 같더군."
"역시 자네는 엉터리군."
또 다시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어차피 얽혀있는 운명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의외의 일에 서로 얽혀들게 되었고, 불만을 가질 사이도 없이 어떻게든 서로를 도와야 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살 길이었다.
"어쩌면…."
"……!"
"어쩌면 말일세. 보주가 흉수라면 우리는 살 수 있을지 몰라."
함곡의 뜻 모를 말에 풍철한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함곡의 말이라면 옳을 것이다. 그는 함곡을 싫어했지만 그의 능력은 누구보다 먼저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풍철한과 함곡. 두 사람은 세간의 평가보다 더욱 치밀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건에 휘말리는 순간부터 당황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아니 철담의 시신을 보는 순간부터라고 해야 옳았다.
시선을 다시 밖으로 돌린 두 사람의 눈에 멀리 배가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루에 두 번 왕복하는 운중선이 들어오고 있음은 이제 오후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오일 중 반나절이 흐르고 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 순간 풍철한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눈에 놀람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누가 오는 거지? 운중보주가 직접 마중 나갈만한 인물이 대체 누구야?"
그 말에 함곡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상만천(尙萬天)이겠군!"
16
"배가 도착했습니다."
서교민의 보고에 긴 여정으로 인한 피로로 앉은 채 잠시 눈을 감고 비몽사몽을 헤매던 신태감이 화들짝 눈을 떴다. 추교학을 만나고 돌아와 잠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
신태감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어깨와 팔을 움직였다.
"헌데 오는 손님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르지만 운중보주가 직접 마중을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신태감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물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단한 인물이지. 본관 역시 직접 마중을 나가야 할 정도로…."
배가 오면 보고하라고 했던 신태감은 단지 그 배에 타고 올 동창의 첩형 경후(卿珝)를 기다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도대체 신태감까지 마중 나가야 할 인물은 도대체 누구일까? 서교민으로서는 오히려 혼란스런 일이었다.
"속하가 모시겠습니다."
서교민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자 신태감은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섰다.
"아니야… 자네는 따라 올 필요 없어. 본관은 조금 늦을 테니 경후가 오면 그 자의 일을 상의해 처리하도록 해봐."
아마 마중해야 할 인물과 저녁이라도 같이 할 모양이었다. 서교민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신태감을 따라 다녀보았자 자신의 모양새만 더 망가지게 된다. 서교민은 우선 그 자를 찾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17
돈의 위력이란 그 어느 것 보다 크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거부(巨富)를 무작정 죽이고 돈을 뺏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아니 권력자는 본래부터 거부와 밀착되어 있다. 권력과 돈은 아주 다른 성질을 가진 것이지만 너무나 친근해 언제나 들러붙기 좋아한다. 권력이란 것이 돈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에 돈은 권력과 밀착할 때 더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후에 들어 온 배에는 거부와 그 딸들이 타고 있었다. 중원에 거부는 많지만 진정한 거부는 오직 이 인물뿐이었다. 그는 중원 최고의 부호였다. 그 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쓰는 것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써도 들어오는 돈만큼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보적(萬寶積) 상만천(尙萬天)
그의 조부(祖父)는 강남에서 꽤 이름 날린 상인이었다. 그의 부친은 중원에서 꽤 이름 날린 지주(地主)였다. 그리고 그는 중원최고의 부호가 되었다. 이미 몇 개인지 모를 염전(鹽田)과 주루(酒樓) 등은 이미 그의 조부 때 기틀을 닦았고, 아침부터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저녁에야 겨우 그 끝을 볼 수 있다는 광활한 땅은 그의 부친이 터를 닦았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수십 배로 만든 사람이었다.
중원 최고의 갑부답게 그의 하선은 정말 장관이었다. 아예 집 몇 채를 통째로 뜯어서 옮겨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처음 내리기 시작한 것은 실제 집의 기둥이나 대들보로 보이는 목재였다. 따뜻한 날씨였지만 이미 울퉁불퉁한 팔뚝 근육을 자랑할만한 거구들 이십여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각종 목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힘은 대단해서 보통사람이 열명 정도 달려들어야 할 물건들을 하나나 둘이 들어 옮기고 있었다.
"보주도 속물이로군. 아무리 중원 최고의 갑부라 해도…."
상만천을 직접 마중 나간 운중보주의 행태를 보며 풍철한이 비틀린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두 사람은 위쪽 난간이 쳐져있는 언덕에서 하선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곡이 당연한 듯 고개를 끄떡였다.
"다른 이유야 어찌되었던 만약 상만천이 마음만 먹으면 운중보를 열흘 내내 굶기는 것도 가능하지."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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