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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권은 자주를 꿈꾼다. 사대주의 정권도 예외는 아니다. 외세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사대주의 정권일지라도, 보다 더 강력하고 보다 더 자주적인 정권을 꿈꾸기는 매한가지다.
사대정권의 허수아비 대통령일지라도 또 여의도만한 작은 나라의 대통령일지라도 마음속 한구석에서 ‘세계 황제’를 꿈꾸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자주는 권력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자주를 꿈꾸지 않는 권력자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지금 당장 ‘자주를 지향하게 될 경우에 생길 이익’이 ‘사대를 계속하게 될 경우에 생길 이익’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대를 경제 논리나 현실 논리로 포장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를 꿈꾸기만 할 뿐 그것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주를 향한 권력적 본능에서 자주정권과 사대정권은 질적인 차이점을 보인다. 정권 차원에서 자주를 지향하는 것은 자주정권이든지 사대정권이든지 간에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문제는 민족 차원에서 자주를 지향하느냐 아니냐에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정권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정권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민족을 위해 자주를 지향하는 정권을 우리는 자주정권이라고 부른다. 그 반대의 경우는 사대정권이다. 사대정권은 정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모든 정권은 최소한 정권 차원의, 혹은 최대한 민족 차원의 자주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주를 향한 ‘내 안의 본능’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수구세력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친미사대주의자였을 리는 없다. 그들도 미국보다 더 강한 나라의 지배층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도 마음 같아서는 미국을 자신들의 수하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할 수만 있었다면.
다만, 그런 원초적 속내를 드러내었다가는 ‘밥통’을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 논리나 경제 논리를 들어 자신들의 친미를 합리화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부득이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바로 여기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질(質)이 드러나는 것이다.
‘한 톨의 밥알과 자신의 존엄성을 바꿀 수 있느냐 아니냐’에서 자주세력과 수구세력이 나뉘는 것이다. 또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하느냐 아니면 공동체를 위해서 존재하느냐 하는 점에서 지배층으로서의 그들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튼 비록 한 톨의 밥알을 지키기 위해서 미국에 사대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자주 본능은 있는 법이다. 그 자주가 고작 정권의 자주라는 점에서 그들의 수준이 ‘한없는 저열함’으로 떨어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들도 자주를 꿈꾸던 자들임에는 틀림없다.
어쩌면 그들은 일반 한국 민중들보다 더 큰 ‘반미감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사대주의적인 종속국에서 굴욕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민중계층이 아니라 지배층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주국 사람들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집단이 종속국 지배층이고,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굴욕감을 가장 많이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굴욕감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주국 미국 때문에 가슴속의 굴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 미국 덕분에 뱃속의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 지배층의 굴욕감은 포만감에 의해 상쇄되었던 것이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국민들을 위해서 굴욕을 감수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청나라 당안(공문서) 전문가로서 조선-청나라 관계 공문서를 분석해 온 서울대 김형종 교수(중국근대사)는 “조선 지배층이 중국에 대해 사대를 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울분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식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라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다. 수구 사대세력이 지배했던 전기(前期) 대한민국 시절. 그 시절의 대한민국 지배층은 민중의 반미지식인들이 느꼈던 것보다 더 강한 울분을 미국에 대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말년에 반미적 경향을 보인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집권 당시의 수구세력이 비록 제한적이나마 대미 자주를 지향했다는 점은 그들이 1968년부터 작전통제권 환수를 지속적으로 추진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밥알(물질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해마다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작전통제권 환수 목소리를 높인 측면도 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근 40년 전부터 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했다는 것은, 그들 역시 미국의 한국 지배에 대해 원초적 거부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도 자주를 향한 ‘내 안의 본능’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남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에 대해 원초적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래서 결코 우리와 남남이 될 수 없는 우리의 혈육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추구한 자주가 정권 차원의 자주였든지 아니면 민족 차원의 자주였든지 간에, 그들이 미국을 상대로 자주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는 일정 정도의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그들이 오늘에 와서 자신들의 말을 바꾸고 있다. 그들이 작전통제권 환수를 적극 반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했던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지냈던 인물들이 한 데 뭉쳐 그 환수를 적극 반대하고 있다.
또 기독교사회책임(공동대표 최성규·서경석 목사)을 비롯한 10개 기독교 단체들도 지난 8월부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유보를 위한 서명운동을 개시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미국 워싱턴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미 정부에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유보를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히기까지 하였다.
50년 가까이 한국을 지배했다가 이제는 수구세력으로 비판받고 있는 이들이 이처럼 태도를 뒤바꾼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작전통제권 환수를 줄기차게 반대했다면, 우리의 당혹감과 배신감이 이처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이제 와서 반대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저 그 뻔뻔스러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0년 가까이 ‘내 것’처럼 생각했던 정권을 잃어 버려, 과거의 모든 기억을 아예 상실한 것일까? 그래서 ‘내 안의 본능’마저 잃어버린 것일까? 지금이라도 작전통제권이 환수되어야만, 자신들이 혹시라도 다시 집권했을 때에 여러모로 좀 더 편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걸까?
그들이 기억을 상실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잃어버린 정권을 되찾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다가 보니, ‘내 안의 본능’을 일시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걸까? 다시 정권을 회복한 뒤에 꺼내 사용하기 위해, 자주를 향한 그 원초적 본능을 잠시 자제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자주적 본능은 토끼의 간처럼 잠시 보관해 두었다가 꺼내 쓸 수 있는 그런 것일까?
자신들도 갖고 싶으면서 그 ‘갖고 싶음’을 억제하는 한국의 수구세력. 50년 넘게 탐욕에 한껏 탐닉되어 살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본능을 억제하고 있는 한국의 수구세력. 50년 넘게 표출해 왔던 본능을 갑자기 억제하면, 인간으로서의 생리적 존재가 갑작스레 정지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그런 불상사를 겪지 않으려면, 수구세력이여 부디부디 ‘내 안의 본능’을 억제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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