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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춘, 손대지 않고 어떻게 선을 길거나 짧게 만들어? 하면서 이해 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춘, 손대지 않고 어떻게 선을 길거나 짧게 만들어? 하면서 이해 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조태용
"아저씨, 이 도로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아세요."

공사장의 책임자로 보이는 덩치가 큰 사내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이미 이 도로 끝까지 가본 경험이 있기에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서운한지 "여기가 끝입니다"라고 맥 빠진 대답을 했다.

그는 아마 나에게 대단한 선물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때 늦게 알은체 한 것을 후회했다. 그냥 사내의 선심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어도 되었을 것을 말이다.

우리는 드디어 회남재의 그 긴 도로를 통과했다. 아스팔트가 끝나고 산길이 이어졌다. 적당한 자갈과 흙 그리고 길 가득 덮인 질경이를 밟고 가야 했다. 길 옆 물가에는 까치수영이 흰 꽃을 바람이 흔들며 우리를 환영해줬다.

"삼춘, 좀 쉬었다 가요" 조카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은 건넸다. 그러고 보니 쉬지도 않고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다. 20kg 넘는 배낭을 메고 긴 오르막을 한 시간이 쉬지 않고 걸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조카와 나는 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조카는 숨을 고르면서 아직도 길이 멀었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많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도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가본 것도 도로 끝이 전부니까.

나는 수첩을 꺼내서 줄 하나를 그었다. 그리고 조카에게 물었다. "정욱아, 이 선을 손대지 말고 길거나 짧게 만들어봐라?" 조카는 삼촌의 뜬금없는 질문에 수첩에 그어진 선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삼춘, 손대지 않고 어떻게 선을 길거나 짧게 만들어?" 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 선 밑에 작은 선 하나를 그었다. 그리고 조카에게 물었다. "이제 좀 전에 그은 선이 길어졌지?" 조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카는 펜을 가져다 다시 긴 선을 하나 그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면 이 선이 짧아지네?" "근데 삼촌 이것은 왜 갑자기 그린 거야?"라고 조카는 물었다.

"세상에 모든 일이 이처럼 상대적이라는 거야? 네가 아까 물었잖아 길이 얼마나 남았냐고?" "그것도 어떤 사람은 길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짧다고 하겠지 안 그래?" 조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남재 정상에는 청학동으로 가는 길과 묵계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졌다. 오른쪽으로 가면 묵계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청학동이 남쪽으로 가면 악양이 나온다고 되어 있었다.
회남재 정상에는 청학동으로 가는 길과 묵계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졌다. 오른쪽으로 가면 묵계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청학동이 남쪽으로 가면 악양이 나온다고 되어 있었다. ⓒ 조태용
"자, 이제 출발하자!"

조카와 나는 무거운 배낭을 다시 추슬러 메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카에게 지금 걷는 길은 얼마나 길게 느껴질까? 우리는 잠시 침묵하며 걸었다. 한 여름의 열기는 늦은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고개를 숙일지 몰랐다. 나는 조카의 젊음과 탄탄한 종아리도 한 여름의 열기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기를 기원했다.

생각보다 회남재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길이 끝나고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오르막길에는 항상 마지막이 있는 법이다. 회남재의 길고 긴 길도 서서히 끝나고 있었다.

회남재 정상에는 청학동으로 가는 길과 묵계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졌다. 오른쪽으로 가면 묵계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청학동이 남쪽으로 가면 악양이 나온다고 되어 있었다. 산길로는 시루봉과 구제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묵계로 향했다.

오르막이 그만큼 힘들어서였을까? 우리는 휘파람을 부르면 호기롭게 산길을 내려왔다. 하지만 벌써 건너편 산에는 우리가 넘어야 할 다음 재인 묵계치가 보였다. 하지만 다음의 어려움이 보인다고 해서 지금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않을 필요까지는 없다.

방울꽃은 우리의 여행을 축복하듯 방울방울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방울꽃은 우리의 여행을 축복하듯 방울방울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 조태용

나비인지 나방인지 알 수 없지만 색이 고왔다.
나비인지 나방인지 알 수 없지만 색이 고왔다. ⓒ 조태용
묵계로 가는 길은 다행히 시멘트 길과 자갈길이 적당히 있어 걷기에 좋았다. 또한 검은색에 섹시한 나비와 화려한 색으로 맘껏 치장한 나비들이 길 앞에서 춤을 추었고 방울꽃은 우리의 여행을 축복하듯 방울방울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서 지프차 한 대가 산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아마 저렇게 산길을 올라서는 오늘 우리가 느끼는 기분을 평생 느끼지 못 할 것이라며 걸어온 자만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회남재를 오르던 그 긴 시간을 충분히 보상 받을만큼 우리는 행복했다.

묵계치를 내려오면 묵계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산에서 흘러오는 물은 가둬놓는 일종의 물감옥이다. 산에서 흘러온 물들은 이 저수지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이들은 잠시 들어온 순서를 잃어버리고 저수지에서 빙빙 방황하다가 건넌편 출구를 통해 다시 긴 여행을 하게 된다.

우리는 묵계 마을 앞에 다리 밑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계곡이 흐르는 곳에 텐트를 치고는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보통 저녁때는 밥을 많이 해서 저녁으로 먹고 다시 다음날 아침에는 누룽지를 해먹으며 남은 밥은 점식 도시락을 만든다. 이런 식사는 혼자 여행을 많이 다닌 나의 경험에서 나온 가장 편안한 식사준비방법 중에 하나였다.

조카는 저녁을 먹자마자 텐트 안으로 직행하더니 잠이 들었다. 곧 코고는 소리가 들렸으나 계곡물 소리에 묻혔다. 나는 옆 텐트에서 야영하는 사람들과 앉아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낮에 잡은 물고기에 밀가루를 묻힌 다음 기름에 튀긴 안주를 먹고 있었다. 나도 몇 점 먹었으나 맛은 비릿했다. 그들은 친척 사이로 부산에서 산다고 했다. 작은 슈퍼를 하고 있으며 그냥 살만 하다고 했다. 옆에 펜션은 하룻밤에 7만원인데 이 값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50대 중년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이 정도 가격이면 싸다고 했으며 친척이라는 남자는 비싸다고 했다. 텐트나 치고 자면 될 것이지 무슨 펜션이냐며 낭비라고 했다. 그들은 나의 대답도 기다리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아주머니의 말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이유는 그 남자가 그 여자보다 윗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결국 나이 먹은 사람이 이기기 쉬운 법이니 말이다. 펜션 가격이 비싸거나 싸거나 하는 문제는 나에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자 나는 텐트로 돌아왔다. 조카는 여전히 코를 골며 하루의 피로를 코로 풀고 있었다. 나도 조카 옆에 몸을 뉘였다. 무엇인가 생각하려 했지만 곧 잠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어제 술을 함께 마셨던 부산에서 온 일행이었다. 아침에 일이 있어 일찍 떠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짐 몇 개를 옮겨 주었다.

그들이 떠난 개울가는 다시 물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떠나야 할 사람은 그들뿐이었던 모양이다. 삼신봉과 청학동을 지나 흐르는 물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서서히 밝아지는 세상을 바라봤다. 잠자리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텐트 끝에 앉아 쉬고 있다.

삼신봉과 청학동을 지나 흐르는 물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서서히 밝아지는 세상을 바라봤다. 잠자리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텐트 끝에 앉아 쉬고 있다.
삼신봉과 청학동을 지나 흐르는 물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서서히 밝아지는 세상을 바라봤다. 잠자리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텐트 끝에 앉아 쉬고 있다. ⓒ 조태용

밤새 지리산에는 물소리가
엄마 잃은 아이 울음소리처럼 징징거리며 울어댔다.

잠자리 날개 젖은 이른 아침
부지런한 매미는 벌써 짝을 찾는 긴 울음을 시작했다.

어제의 피로는 묵직하게 근육에 남아있고
까닭 없이 눈꺼풀엔 아이처럼 눈곱이 자라고 있었다.

작은 텐트에서 조카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밤새 동침한 모기는 통통히 살이 쪘다.

피로를 푼 우리도 맘껏 배를 채운 모기도
모두 행복한 밤이 그렇게 가고 다시 아침이 밝아온다.

- 졸시 '묵계에서 맞은 아침'


저수지로 흘러가는 물을 담아서 누룽지를 끊인 다음 조카를 깨웠다. 조카는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제 이름을 부르자마자 일어섰다.

"밥 먹고 출발하자, 우리 갈 길이 멀잖아." 조카는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아침 누룽지는 맛이 좋았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겼고 길을 떠났다. 묵계 초등학교를 지나 잠시 청학동 가는 도로를 걷다가 묵계치로 오르는 길로 접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농산물 직거래 참거래 농민장터(www.farmmate.com)에도 올립니다.

지리산 도보여행에 대한 궁금한 사항은 www.farmmate.com 사는 이야기에 질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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