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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원을 하다 잠시 운동장을 바라보는 딸의 모습
ⓒ 남궁경상
지난 20일 딸 하영이가 다니는 인천 문학초등학교 가을운동회가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열렸다.

전날 저녁 마트에 가서 김밥재료를 사고 이른 새벽부터 아내와 함께 김밥을 준비하는데 내가 운동회를 하는 것처럼 마냥 신이 났다. 아내는 점심시간에 잠깐 학교 밖에 나가서 밥을 사먹자고 했지만, 그 말은 들은 딸의 입이 황새 입처럼 튀어나오는 바람에 김밥을 만들게 된 것이다.

사실 나도 아내가 점심을 사먹자고 할 때 아부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맞장구를 쳤지만 내심 속으로는 '그래도 운동회 날인데 학교 나무 그늘서 이 집 저 집 김밥을 나눠 먹으면 좋을 텐데···'하는 생각이 있었다. 결국, 딸의 뾰로통한 입 덕분에 아빠와 딸은 마음 들뜨는 운동회를 맞게 되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니 수백 명의 아이가 재잘재잘 거리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남아있던 어릴 적 시골 초등학교 때 달리기와 공 굴리기, 줄다리기를 하던 나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나 이 날 운동회에서 내심 나를 걱정하게 하는 문제가 있었다. 7살 때 천식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별다른 큰 증상 없이 지내던 딸이 2주 전 늦은 밤에 호흡곤란으로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천식이 심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딸
ⓒ 남궁경상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충격과 함께 온갖 염려와 생각들이 스치며 마음이 아파졌다. 의사는 매일 흡입하는 약과 비상시에 사용하는 약, 그리고 먹는 약을 처방해 주며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치료를 하면 좋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했는데도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더구나 운동회 연습을 하다 두 번이나 응급상황이 발생해 응급약을 들고 학교 교실로 뛰어갔던 터라 내 딸이 별 탈 없이 운동회를 마칠 수 있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딸이 드디어 4학년 달리기 "운수 좋은 날" 순서가 되어 출발선에 나오게 되었다. "운수 좋은 날"은 달리기를 하다 노랑, 파랑, 빨강 막대 중에 한 가지를 자기 맘대로 들고 뛰게 되는 데, 앞에 놓여 있는 큰 통 근처에 있는 사람이 노랑 깃발을 들면 노랑 막대기를 잡은 사람은 계속 뛰게 되지만 다른 색 막대기를 잡은 사람은 한참을 뒤로 다시 돌아가서 깃발과 같은 색깔의 막대기를 들고 다시 뛰어야 한다.

운이 따르면 꼴찌로 오던 사람이 1등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다. 드디어 출발 소리와 함께 달리던 딸이 파랑막대를 들고 2등으로 뛰어나갔다.

'오마이 갓···.'

커다란 통에서 노랑 깃발이 올라오고 만 것이다.

아쉬움에 뒤로 돌아간 딸은 노랑 막대를 들고 다시 뛰었지만 4등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등수를 떠나 열심히 뛰어 오는 딸을 카메라에 담으며 내 마음은 기쁨이 가득했다. 운동회가 끝나고 3등 안에 들지 못한 것이 서러운 딸은 아빠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아빠 딸, 잘했어!"

아빠가 속상한 마음을 보듬어주자 딸은 예전의 밝고 예쁜 모습으로 돌아와 운동회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이어달리기가 끝나자 반대표로 뛰었던 하영이는 다시 풀이 죽어서 돌아왔다.

▲ "운수 좋은 날" 달리기를 하는 딸
ⓒ 남궁경상
사실, 천식이 있는데도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이어달리기 반대표로 뽑혔던 하영이를 보면서 자랑스러웠지만 이번 운동회는 내심 걱정스러웠던 터였다. 운동회 마지막 순서인 이어달리기에서 하영이가 전력질주를 하지 못하고 불편한 몸동작으로 달리자 혹시라도 천식때문인가 싶어 걱정도 더 커졌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뛰어가는 하영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고, 감동의 눈물까지 눈가에 맺혔다. 상대편 주자와 점점 거리를 좁히며 뛰어오는 딸이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왜 풀이 죽었던 걸까.

하영이가 속상해 한 이유는 '운수 좋은 날' 달리기를 하던 중 발목을 삐끗해 이어달리기를 할 때 한쪽 발목에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영아! 아빠는 네가 발목이 아프든, 천식으로 숨이 차든지 최선을 다했기에 자랑스럽단다."

딸은 이 날 받은 공책 4권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5반에서 그래도 자기가 공책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다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풀이 죽어있던 딸이 다시 생기를 찾자 나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우려하던 천식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 하영아! 앞으로도 오늘 운동회처럼 아무리 뜀박질해도 숨이 차거나 힘들지 않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할게.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오늘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행복한 하영이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오늘 아빠는 하영이 때문에 행복했단다."

▲ 이어달리기에서 출발하는 딸의 모습
ⓒ 남궁경상
▲ 이어달리기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는 딸
ⓒ 남궁경상
▲ 이어달리기에서 우승한 마지막 주자의 환희
ⓒ 남궁경상
▲ 줄다리기 하는 제자들을 응원하는 선생님
ⓒ 남궁경상
▲ 추억의 학부모 달리기에서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흑투성이가 된 어머니가 다시 일어나 끝까지 달려 어린이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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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학년 어린이들이 "바람처럼 쌩쌩" 달리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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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과 같은 반 장애우 어린이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끝까지 달리고 있다.
ⓒ 남궁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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