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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호주 '카우라(Cowra) 수용소'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60여년 전 150여명에 이르는 한국인들이 태평양 전쟁포로로 수감된 곳입니다. 징용·징병 등 일제 식민통치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두세 차례 국내언론의 보도가 있긴 했지만 카우라 수용소는 제대로 조명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이회정 전 '카우라 한국인 희생자 추모사업회' 회장과 함께 국내 언론 처음으로 당시 생존자의 후손을 찾아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오마이뉴스>는 잊혀진 역사 '카우라 수용소'를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국내는 물론 호주 통신원의 현지 취재를 통해 잊혀진 역사를 새롭게 복원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자주>
▲ 일본군 제복을 입은 박귀남('타카오 마츠모토')씨. 그는 호주의 카우라 수용소에 있다가 무사히 귀환한 150여명의 한국인 중 한 명이다.
ⓒ 박수진씨 제공

가을 햇살치곤 꽤 따가웠던 지난 9월 22일 오후. 기자는 부산행 KTX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자의 손에는 호주의 '카우라 한국인 희생자 추모사업회'(회장 이회정)가 활동을 마감한다는 <시드니 코리언 헤럴드>(2004년 8월 20일자) 기사가 들려 있었다.

카우라(Cowra) 수용소. 태평양전쟁 당시 150여명의 한인들이 수용돼 있던 곳이다. 일본·호주에서야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잊혀진 역사'다. 기자는 지금 국내 언론 최초로 카우라 수용소 생존자의 후손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할아버지가 이승만 언급했다가 부친이 징병돼"

기차가 부산역에 멈췄다. 기자는 역과 바로 연결된 지하철을 타고 종점인 노포동역(부산시 금정구)에서 내렸다. 노포동(老圃洞)이란 지명은 '농사가 잘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노포동의 '포'(圃)가 '채마밭'이란 뜻이다.

지하철역 근처에는 제법 큰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오랫동안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어서인지 한적한 시골 같은 인상을 주었다. 전화를 받고 마중나온 박수진(57)씨가 기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이렇게 먼 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더."

암과 싸우고 있다는 박씨의 눈매가 서글서글하다. 그를 따라 꽃밭과 덩치 큰 하얀색 진돗개가 인상적인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노포동에서만 30여년을 살았다. 그의 부친이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안타깝게도 지난 85년 비오는 날 채마밭을 가꾸러 산에 갔다가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해 눈을 감았다.

기자는 박씨에게 60여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한때 '타카오 마츠모토'(松本貴男)로 살았던 그의 부친 박귀남(朴貴男)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작고한 박귀남씨는 호주 카우라 수용소에 있다가 살아서 귀환한 150여명의 한국인 생존자 중 한명이었다. 1918년생인 그는 20대였던 1940년대 초반 징병됐다. 여기에는 '사연'이 좀 있었다.

"아버지 고향이 경남 하동 행촌리다. 밀양 박씨. 거기서 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했다. 술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침을 아주 잘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내가 이승만 박사하고 면(面)이 있다'고 얘기한 걸 누군가 듣고 일본 순사에게 고자질한 모양이다."

박귀남씨는 '4대 독자'였기 때문에 징병을 피할 수 있었다. '귀남'은 집안에 손이 귀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와 안면이 있다고 얘기했다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일제가 그냥 놔둘 리 만무했다.

"부친은 외동아들이라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 발언 때문에 주재소에서 부친을 불렀다. 일본 순사는 '당신 아버지가 독립운동 운운하는데 아버지를 징병에서 빼내려면 당신이 대신 군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끌려간 것이다."

▲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전달한 '남방군 제8방면군 제20사단 유수명부'. 여기에 '松本貴男'(타카오 마츠모토)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름 밑의 '除(제)'는 '제대했다'는 뜻이다.
ⓒ 박수진씨 제공

"하도 풀을 많이 뜯어 먹어 사방에 풀이 없을 정도"

박수진씨가 기자 앞에 부친의 사진첩을 꺼내놓았다. 거기에 4대 독자 '박귀남'이 아닌 일본 군복을 입은 '타카오 마츠모토'가 있었다. 아주 반듯하고 강인한 풍모가 느껴지는 외모다.

박씨의 부친은 1944년 초 연합군에 붙잡혀 호주의 카우라 수용소에 수감됐다. 그는 당시 일본의 '남방군 제8방면군 제20사단'에 소속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당시 카우라 수용소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수용소 얘기는 잘 안했다. 원래 아버지가 입이 무겁기도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술 한잔 드시면 '뱀도 잡아먹고 정말 고생 많았다' 하는 정도만 얘기했다."

그나마 부친은 연합군에 붙잡히기 전 자신이 어떻게 생존했는지는 가끔 털어놓았다. 박씨는 생존을 위한 부친의 고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파푸아뉴기니아라는 섬에 상륙했다고 한다. 패잔병 처지로 도망다녔다. 배가 고프니까 풀을 뜯어 먹었는데 얼마나 풀을 많이 뜯어먹었던지 사방에 풀 한포기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살기 위한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쌀 한줌을 배낭에 넣고 다니면서 정말 배고플 때 조금씩 씹어 먹었다고 한다."

'4대 독자'라는 점도 부친의 생존의지를 극대화했다. 수류탄을 껴안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살아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이 떠올라 그것도 포기했다. 그러다 결국 연합군에 붙잡혔다.

"그렇게 패잔병으로 떠돌다가 너무 배가 고파 원주민 마을에도 갔다. 거기서 한동안 잘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과 호주 등 연합군이 일본군 소탕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총을 들고 있는 일본군은 무조건 사살됐다. 그래서 부친은 살기 위해서 총까지 던져버렸다. 그러다 붙잡혀 카우라 수용소로 간 것 같다."

▲ 박귀남씨는 1949년 경찰에 투신했고, 이후 한국전쟁 때에는 빨치산 토벌대장으로도 활약했다. 일본군에 복무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 박수진씨 제공

일본군 복무 경험 살려 경찰계 투신... 공비토벌대장으로도 활약

그런데 1945년 경남 하동 집으로 '타카오 마츠모토'의 사망통지서가 도착했다. '4대 독자'를 잃은 슬픔은 컸다. 그러나 1년이 지나서 박씨의 부친은 일본을 거쳐 무사히 귀환했다.

"46년 말인가 귀국했다고 한다. 사실 이미 사망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에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멀쩡하게 살아오니까 진짜 아들인지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절구통에 손톱을 찧어서 손톱이 납작하게 갈라졌다고 한다. 그 손톱을 확인하고서야 진짜 아들로 인정했다."

박씨의 부친은 1948년께 친척의 중매로 당시 22살이었던 조순심(1927년생, 79)씨와 결혼했다. 30살의 늦장가를 든 셈이다. 조씨는 "외삼촌이 중신(중매)을 섰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듬해(1949년) 첫아들인 박씨가 태어났다.

부친은 박씨가 태어났던 1949년 경찰계에 투신했다. 일본군에 복무했던 경력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해방 이후 군인이 많이 필요했다. 군에서도 아버지에게 중사나 상사 계급을 준다며 오라고 했다. 아버지가 일본군에 있었으니까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하도 질렸는지 군에는 안 갔다. 그러다가 결국 경찰이 됐다."

부친의 선택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그는 일본군에 복무했던 경험을 발휘해 빨치산(공비) 토벌대장으로 활약했다.

"공비 토벌대장으로 있으면서 서부 경남 지역에서 공비들과 교전을 많이 했다. 전과도 많이 올려 신임을 받았다. 무기를 다루는 기술도 인정받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 있으면서 전투를 치렀던 것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가 계신 곳은 공비들이 거의 안올 정도였다. 전투를 잘 치른다고 소문이 나서 안 건드린 것 같다."

하지만 부친은 상급자와 갈등을 겪은 뒤 약 10년의 경찰 생활을 끝마쳤다. 이후 숯 만드는 사업에 뛰어들어 한때는 지프차를 두 대나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 호주 저널리스트 해리 고든이 1978년 펴낸 중에서 박귀남씨를 언급한 부분. 해리 고든은 "타카오 마츠모토가 무사도 정신에 충실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썼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해리 고든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박씨의 부친이 카우라 수용소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호주의 한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책에서 '타카오 마츠모토'를 언급해 놓아 그의 면모와 수용소 생활을 조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해리 고든(Harry Gorden) 전 <시드니 모닝 헤럴드> 기자는 지난 1978년 < Die Like The Carp >를 썼다(1994년에는 증보판으로 < Voyage From Shame >를 내놓았다). 30여년 동안 호주 정부도 숨기도 있던 '카우라 수용소'를 처음으로 다룬 책이었다.

해리 고든의 책에 따르면, 부친은 1944년 초 뉴기니아 해안의 한 동굴에서 붙잡혔다. 뉴기니아섬은 태평양전쟁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944년 5월 17일(호주 정부측 자료) 카우라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돌 깨는 작업을 맡았다.

"타카오 마츠모토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징병돼 취사(a cook)와 노역(labourer)에 종사했던 한국인이다."(< Die Like The Carp >, 80쪽)

"타카오 마츠모토는 1941년과 1945년 사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복무한 20만명의 한국 남성들 중 한 명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군인으로 자발적으로 입대했지만 다수는 강제로 징용되었다."(< Voyage From Shame >, 94쪽)

해리 고든은 "일부에서는 그를 부산에서 온 제과기술자(baker)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확신할 수 없다"며 "그는 생존하는 재주가 있어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아마 박씨나 김씨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일본군 안에서 '열등한 존재'(inferior)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힘든 일을 도맡아야 했다. 해리 고든도 "그는 음식을 만들고 땅을 파고 가끔 전투를 치렀지만 어느 일본군도 그에게 감사하지 않았다"며 "그는 (일본군 안에서) 열등한 존재였다"고 적었다. 그런 차별 때문이었는지 박씨 부친의 '항일의지'가 상당했다고 한다.

"타카오 마츠모토는 전쟁에 관한 훈련과정을 모두 이수했고, 무사도 정신에 충실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 그는 일본군 생활이 그에게 강요하는 여러 가지 규율에 분개했다."(< Die Like The Carp >, 82쪽)

▲ 박귀남씨의 큰아들 박수진씨와 그의 모친 조순심씨. 박수진씨는 "아버지는 생전에 카우라 수용소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그가 일본군 포로 대탈출 계획을 호주군 장교에게 알려준 이유

일본군의 한국인 차별은 결국 우연히 들은 일본군 포로들의 대탈출 계획(딸림기사 참조)을 호주군 정보장교에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박씨의 부친이 호주장교에게 한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군 포로들이 나쁜 일(대탈출계획을 말함 - 기자 주)을 한다면 우리 한국인들도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나는 일본사람도 아니고 앞으로 일본사람이 될 사람도 아니다."(< Voyage From Shame >, 103쪽)

이어 박씨의 부친은 일본군에도 감사의 뜻을 나타냈는데, 그 이유가 상당히 '애국적'이라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나는 일본인들이 나에게 군사기술을 전수해주었고, 지금 내 동포들에게도 전수해준 데 감사한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언젠가 한국인들이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해리 고든은 박씨의 부친이 대탈출사건 이후 일본군 포로들에 의해 타살됐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1946년 5월 27일 빅토리아주 머치슨(Muchison)에서 시드니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고, 같은 해 한국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박씨는 최근 이회정 전 회장과 이날 기자의 방문을 계기로 아버지의 '과거'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기록이 없다고 하면 모를까 이렇게 기록이 있는데 정부가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고 정부에 서운한 감정을 내비친 뒤 "이번을 계기로 150여명에 이르는 카우라 수용소의 한국인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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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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