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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살이 한창인 여름, 출퇴근길에 바라보는 길가의 풀섶에는 정체불명의 꽃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개망초보다 조금 작은 꽃, 아마도 개망초의 변종인가 했다. 가을이 완연해졌을 때 막히는 차 안에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언제 그렇게 무성하게 작은 꽃들을 피었는지 하얀 별들이 풀섶에 새겨진 듯 했다.
서울에서 동부간선로를 타고 출퇴근을 하시는 분들 중에서 도로중앙의 풀섶을 유심히 보신 분들도 계시리라. 그 곳은 야생화 자생지로 조성을 해서 벌초를 하지 않는다는 안내문까지 있고, 제법 모델이 될만한 꽃들이 지금도 피어있다.
해바라기 서너 그루도 제법 그럴듯하고, 박주가리꽃은 그렇게 무성진 곳을 보질 못했으며 오늘의 주인공 미국쑥부쟁이도 제법 볼반하다. 단, 그 곳에 차를 세울 수 없다는 점과 차들이 쌩쌩달리기 때문에 풀이 늘 흔들린다는 것이 단점이다. 게다가 눈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단점이다.
한 여름 퇴근길에 석양빛에 눈부심을 발하는 강아지풀들을 보면서 역광으로 찍으면 꽤 좋은 작품이 나오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지만 단 한 번도 시도하질 못했다. 한번 차를 타면 목적지까지 거의 쉴곳이라고는 없는 도로환경을 원망할 수밖에.
편리해지는 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많은 세상을 산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파과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 관계가 진리인 것처럼 믿고 살아간다.
조금 불편해도 더불어 사는 길을 택하면 결국은 가장 편리한 세상이 열릴터인데 아직 우리는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어느 한 편이 배려되지 않음으로 인해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개망초같기도 했던 그의 이름을 알았을 때 '하필이면 미국쑥부쟁일까?'하며 씁쓸했다. 초강대국 미국의 오늘 날 행태를 생각하니 '미국'자가 붙은 것만으로도 싫어진다. 그래서 두어 달 그를 바라보면서도 카메라에 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카메라에 담지 못한 꽃이 어디 피었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던 내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근교의 산길에 피어있는 미국쑥부쟁이를 만났을 때 그 작은 하얀 별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내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수입된 미국산 농산품 속에 섞여있다가 퍼지게 되었으리라. 저기 강원도까지 하얗게 피어난 미국쑥부쟁이, 그도 우리내 쑥부쟁이꽃이 가진 전설을 가지고 있을까?
쑥부쟁이는 '쑥+불쟁이(대장장이)'의 합친 말로 쑥을 캐던 대장장이 딸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꽃이다. 그 전설은 본인의 이전 연재기사 '내게로 다가온 꽃들(89)'에 소개되어있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그래서일까? 꽃을 보는 순간 측은해 진다. 초강대국 미국의 횡포에 넌더리를 내다보니 어쩌면 미워해야 할 대상에 혼동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언제부턴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이후 그도 갖은 서러움을 겪으면서 퍼져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귀화식물 중에서 가을의 상징이 된 코스모스는 신작로를 닦으면서 흙의 유실을 막기 위해 들어온 이후 우리내 정서에 깊이 자리잡은 꽃이 되었다. 달맞이 꽃처럼 아예 우리 이름을 얻어 시와 노래로 불리워지는 귀화식물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아예 국명(國名)이 앞에 붙어버리면 수 십년을 이 땅에 살아도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쑥부쟁이의 퍼져나가는 모습으로 보아 가을 들판에 우리네 수 많은 쑥부쟁이들보다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될 것 같다. 몇 대를 이 땅에서 살아도 이방인의 흔적을 담고 살아야 하는 존재, 그래서 조금은 측은했다. 왜냐하면 마치 제국열강들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게 이국 땅에서 몇 대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꽃은 미워하지 말자.
어떤 귀화식물 중에서는 오직 자기의 영역만을 탐하는 것들이 있다. 도무지 더불어살지 못하고 우리네 토착식물들을 초토화시키며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생태환경을 위해서도 관리를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두어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면, 그래서 아주 오랜동안 우리와 함께 한 꽃이 있다면 그 고향이 어디든지 우리 꽃이라고 하면 어떨까?
이 땅에서 피고지고 또 피고지고
사람들 손길없이도
이 땅에서 피고지고 또 피고지고
이 땅에 살던 이들과 어우러져
이 땅에서 피고지고 또 피고지고
한 해 두 해 아주 오랫동안
이 땅에서 피고지고 또 피고진 꽃은
우리 꽃이라고 하자.
- 자작시 '귀화식물'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들 중에는 취해야 할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 무조건 버리는 것도, 무작정 취하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귀화식물, 외래종이라고 하면 고운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도 우리네 생활 속에 들어있는 부정적인 귀화, 외래문화 등에 대해서 까지도 너무 관대했는지도 모른다. 아예 일상화되어 국적불명의 문화들이 우리의 것처럼 되어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이런 면에서 들꽃은 솔직하다. 어느 곳에 피든 자기의 모습, 자기의 속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자기의 모습 그대로 피어나는 들꽃, 어느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래, 꽃은 미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