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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찍은 어머님 사진
제주도에서 찍은 어머님 사진 ⓒ 나관호
어머니 얼굴에 갑자기 근심이 사라지고 화색이 돋는다. 생밤이 어머니 마음을 바꿨다. 손님맞이 걱정을 잊으셨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치매 노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d단조'를 틀어 놓고 어머니의 마음에 평온함을 더해 주었다.

어머니가 밤 까기에 집중력을 보이면서 손님 이야기가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손님 오신다는..."
"무슨 손님! 오늘 손님 오니? 그래서 밤 까는 거야?"
"아니에요. 밤은 내가 먹으려고 그럽니다."

어머니는 율피(밤의 속 껍질)하나 남기지 않고 반들반들하게 깎아 놓으신다. 어머니의 그런 지극정성은 자식을 섬기는 마음에서 나온다. 대충 하시라는 말을 듣지 않으신다. 어머니의 마음은 신비한 기관이다.

밤을 까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입을 여신다.

"생밤이 몸에 좋아."
"어떻게 아셨어요?"
"아유, 너의 할아버지가 생밤을 좋아했어. 생고구마도 좋아하셨고."

이야기꽃이 필 시간이다. 이럴 때는 장단과 추임새를 잘 맞춰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어머니의 이야기꽃이 더 활짝 피기 때문이다.

"아유, 그러셨어요? 어머니가 힘 드셨겠어요."
"아이쿠, 말도 말아라. 할아버지 손님도 많았지, 할머니 손님도 많았지..."
"그래요?"
"근데, 니 아버지가 나한테 잘했어. 그러니까 안 힘들드라. 호호호."
"아버지가요? 어떻게 하셨는데요? 생각나세요?"
"암. 생각나지. 손 잡아주고, 발 씻어 주고 그랬어. 호호호."
"좋으셨겠네요."
"아이쿠, 그럼 뭘 해 영감 없는데."
"그럼, 영감님 한 분 소개 시켜드려요?"
"에이, 그런 소리 말아라."

어머니와의 이야기꽃은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머니가 밤 까기를 마친 후 내가 아버지처럼 손을 잡아드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렸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부끄럽다 하시면서도 "좋네 좋네"를 자꾸 하신다. 어머니의 자그마한 발이 한 손에 잡힌다. 말라버린 발을 보니 세월도 느껴지고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튼 다른 때 같지 않고 오늘은 특히 마음이 뭉클하다. 이유는 아버지 생각도 오버랩 되어서다.

대학 때 아버지 유품이었던 옷깃 넓은 옛날 양복을 입고 다녔던 기억, 아버지가 차셨던 시계를 차고 다녔던 기억. 아버지의 선글라스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잃어버렸다. 몇 년 전 이삿짐을 풀었을 때 아버지의 물품들이 사라져 버렸다. 짐작은 갔지만 본 것이 아니고,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아는 분의 소개로 만난 사람들이라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물건도 영원한 주인이 없다는 생각에 추억에 묻어버렸었다.

어머니에게 다시 물었다. "어머니! 언제 기분이 제일 좋으세요?"

잠시 생각하시더니 대답하신다. "밤 깔 때. 그리고 아들이 발 씻겨 줄 때."

모두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어머니. 어머니의 바람대로 밤 많이 까게 해드리고, 발도 매일 씻겨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밤과 발'의 유머스러운 상관관계. 즉 둘이 형제같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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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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