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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 오마이뉴스 권우성
개성공단사업은 되고 금강산 관광사업은 안 된다고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에 와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대해 얘기할 것이라고도 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말이다.

다른 나라의 일개 차관보가 남의 나라 사업에 시시콜콜 간섭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언론은 거의 없다. 오히려 힐 차관보의 발언을 엄중한 압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지점에서 사대니 자주니 하는 개념이 나올 법 하지만 그리 현실적이지는 않다. 유엔 결의안 1718호에 대량살상무기 관련 자금과 물자의 거래중단 조치가 명시돼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 따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정간섭이 아니라 유엔 결의안 존중을 강조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 말이다.

따라서 짚어야 할 건 양대 경협사업이 대량살상무기와 관련돼 있느냐는 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별로 생산적일 것 같지 않다. 미국과 한국 정부(더 정확히 말하면 익명의 정부당국자)의 해석차가 너무 크다. 게다가 국제 질서는 논리의 정합성이 아니라 힘의 우열에 따라 움직인다.

한국이 내놓을 카드는?

하나로 좁히자. 한국 정부의 전략이다. 한국의 처지와 미국의 위세를 종합 검토해 내놓을 카드가 뭘까?

이 점을 짚기 위해서는 먼저 힐 차관보의 발언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 힐 차관보의 발언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일까?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힐 차관보는 "개인적인 견해"라고 했다. 개성공단사업은 되고 금강산 관광사업은 안 된다는 말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PSI에 대해서는 "배의 운항에 대한 공격적·적대적 접근이 아니라 국가들이 어떤 원칙에 합의하는 과정"이라면서 "왜 PSI가 한국 언론에서 그렇게 큰 이슈가 됐는지 잘 이해가 안 갔다"고 했다.

여지를 남겨놓은 발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협상 여지다. 양대 경협사업에 대해서는 조정 가능성을 남겨놨고, PSI에 대해서는 무력 충돌 우려를 희석시키는 데 주력했다.

한발 더 나가 보자. 힐 차관보의 말대로라면 한·미간 쟁점은 금강산 관광사업과 PSI로 좁혀진다. 미국 입장에선 두 사안을 한국 정부가 모두 수용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모두 수용한다면 한국 정부는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다. 대북포용정책의 상징을 내팽개치는 행위와 국지전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할 것이고, 이 여론이 '반미정서'로 확산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선책을 택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방법은 주고받기다.

되돌아보면 의아한 점이 하나 떠오른다. 미국은 양대 경협사업 중 개성공단사업에 더 비판적이었다. 북한에 전략물자가 반입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 제이 레프코위츠 미국 북한인권특사는 개성공단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수차례 거론한 바도 있다.

그랬던 미국이 태도를 바꿨다. 개성공단사업은 괜찮고 금강산 관광사업은 안 된다고 했다. 논리는 "북한의 권부에 돈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논리가 부실하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금강산 관광 대가나 개성공단 노동자 임금이나 똑같이 달러로 지급한다. 미국의 논리를 차용해서 말하면, 어느 달러에는 '대량살상무기 제조용'이란 딱지가 붙고, 다른 달러에는 '생필품 구입용'이란 도장이 찍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개성공단에는 대량살상무기 관련 자금 뿐 아니라 대량살상무기 관련 물자 반입 가능성도 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주)신원 에벤에셀에서 봉재일을 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
개성공단에 입주한 (주)신원 에벤에셀에서 봉재일을 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 ⓒ 한성희
태도를 바꾼 미국... 그러나 부실한 논리

정상적인 논리라면 양대 경협사업을 모두 묶던지, 아니면 개성공단을 걸고 금강산 관광을 풀어야 한다. 그런데도 미국은 수를 거꾸로 놨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서 밝힌 차선책, 즉 거래용이라고 설정하면 금강산 관광사업은 카드다. 한국 정부의 PSI 참여 확대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용 카드다.

이렇게 보는 이유가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직후 부시 미 대통령이 발표한 특별성명에는 핵의 제조보다 핵의 확산에 더 크게 우려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북한이 핵무기나 핵물질을 다른 나라 또는 비국가적 실체들에게 이전한다면 미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도 북한 핵실험 후 가장 먼저 한국의 PSI 참여 확대를 거론했다.

북핵에 대한 미국의 기조가 이렇다면 한국이 PSI 참여폭을 확대하는 건 긴요한 일이다. 특히 중국이 PSI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절실하다. 일본이야 걱정할 일이 없고, 한국만 설득하면 이를 지렛대 삼아 중국을 압박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한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뭘까? 창호지 구멍 같은 단서가 하나 있다. 동북아시대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외교통상부 국제안보 대사를 맡고 있는 문정인 교수가 오늘자 <한겨레>에 기고한 글이다.

문 교수는 이 글에서 미국에 남북경협 중단 반대의 뜻을 분명히 전하되 PSI에는 참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북한 선박 검색이 한국 영해 인근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참여하여 미국·일본쪽과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였다.

글의 형식은 '권고'이지만 거꾸로 읽을 수도 있다. 문정인 교수의 위치를 고려할 때 이 글에 정부의 복심이 녹아있을 수도 있다.

흐름도 그렇게 가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북한 선박 검색에 대한 실무협의에 들어갔다. 한반도 인근 공해상에서는 미국의 검색활동을 지원하고 자기 수역 안에서는 독자적으로 북한 선박을 검색한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여기에 이지스함과 P3-C초계기 등 첨단 장비와 함께 해상자위대 산하의 특수부대까지 동원할 계획이라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뿐만 아니다. 규마 후미오 일본 방위청 장관은 "미군 급유 활동 중 공격을 받는다면 어느 쪽이 공격을 당하는지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며 "그 경우 반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지난 2004년 10월 26일 일본 사가미만에서 펼쳐진 미국-일본-호주-프랑스 4개국 대량살상무기해상압수기동훈련중 일본 해상보안청 헬기한대가 해골마크가 그려진 가상 대량살상무기 운반선위로 줄사다라를 내려 정예 대테러요원을 낙하시킬 준비를 하고있다.
지난 2004년 10월 26일 일본 사가미만에서 펼쳐진 미국-일본-호주-프랑스 4개국 대량살상무기해상압수기동훈련중 일본 해상보안청 헬기한대가 해골마크가 그려진 가상 대량살상무기 운반선위로 줄사다라를 내려 정예 대테러요원을 낙하시킬 준비를 하고있다. ⓒ AP·연합뉴스
최상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

일본의 입장은 이미 정해졌다. 미국의 태도도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만 빠져나가면 이른바 남방3각, 즉 한·미·일 공조체제에서 한국이 이탈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한국 정부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바에는 PSI에 참여하되 선을 적절히 지키고, 그 대신 양대 경협사업을 챙기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PSI에 참여해 미·일의 북한 선박 검사 수위를 적절히 제어할 수만 있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최상급의 가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도 있다. 미국이 양대 경협사업을 용인하되 달러 제공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할 경우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한국의 PSI참여에 반발해 북한이 먼저 양대 경협사업의 수정을 시도할 수도 있다.

북한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추가 핵실험을 강행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미국과 국내 보수여론이 더 강하게 한국 정부를 압박하면서 손에 쥔 한 마리 토끼마저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정해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 코멘트는 이래서 나온다. 옴짝달싹할 여지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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