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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령에서 바라 본 강릉 전경
ⓒ 최삼경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떠나서 비로소 자유가 되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윤후명의 소설 <산역>의 배경이 된 강릉을 찾아가는 가을 길은 그야말로 하늘과 바람이 일구어 놓는 환상적인 트레킹 코스를 밟는 느낌이다. 자연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란 문구를 당당히 내세울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탈이 주는 해방감은 사람을 짠~하게 해주고 있다.

하늘은 무심한대로 높고 푸르지만 평창부근에서는 지난여름에 발생한 수해를 복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천지불인야(天地不仁也)'라는 구절이 절로 생각났다. 치산치수가 국치의 근본이었음은 땅에서 나고 죽는 이들의 생존근거가 되는 셈이었으니, 물은 그저 알맞은 대로 흐르는 부드러움, 그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윤후명에게 산과 바다와 선녀와 축제로 남아있는 강릉, 작품을 쓰기 위해선 어떤 신앙적인 산과 바다가 작가 안의 정신적 배경이 돼야 하는데, 그에게 있어 산은 영검있는 대관령이며, 바다는 맑고 짙푸른 동해바다라고 얘기한다. 그것은 강릉을 고향으로 둔 자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인간은 언제고 자기를 키워 준 땅을 배반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덧붙인다.

▲ 대관령 운무
ⓒ 최삼경
영동과 영서를 잇는 길목이자 서울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해발 865m의 대관령! 지금은 높이 솟은 다리와 산허리를 뚫은 터널로 전혀 다른 길이 되었지만, 하늘아래 놓인 가을 풍광은 여전히 사뭇 찬란하다. 얼마 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릉 단오제도 기실은 이 대관령에 뿌리를 둔 행사이다. 고대 부족국가인 동예의 무천이라는 제천의식에서 발원(發源)하여 오늘날까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전승돼 온 지역이라 생각하니 바람마저 상서로운 느낌이었다.

"가난과 슬픔과 아우성이 한데 어울려 녹아서 더욱 색감 좋은 해갑청(蟹甲靑)의 청록색을 띠고 있는 바다는 무언가 생생한 감동을 지니고 넘실거렸다."

전설 하나, 옛날 강릉에 어떤 처녀가 샘물에 갔다가 바가지에 해가 떠올라 있는 물을 마시고 아이를 낳았다. 마을 사람들과 가족이 아비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꾸짖어 처녀는 뒷산 학바위 밑에 아이를 버렸다. 이튿날 처녀는 새들이 날아와 깃으로 덮어주고 짐승들이 젖을 먹여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는 다시 집으로 옮겨졌고, 총명함을 떨쳐 나중에 나라의 스승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는 뜻에서 범일(泛日)대사라고 불렀다. 범일대사는 죽은 뒤 대관령의 성황신이 되었다.

▲ 대관령 국사 성황당비
ⓒ 최삼경
전설 둘, 정(鄭)씨 집에 한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성황신이 내려와 혼인을 청했는데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며칠 뒤 호랑이가 내려와서 그 딸을 물어가 버렸다. 마을의 사람들이 대관령의 성황당에 가보았더니 딸은 성황신과 짝지어져 있었다. 이 두 꼭지는 예전부터 강릉지방에 전해내려 이야기인데 강릉 단오제는 이 대관령 국사 성황신과 그 부인을 제사 지내는 것이다.

골이 높고, 깊을수록 산자락마다 많은 이야기들이 간직돼 왔다. 그 옛날 자연과 어둠, 공포와 무지가 삶의 원형에 접근하는 주요한 통로였듯이 신화는 어쩌면 이런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이 꾸는 꿈과 같다. 신화는 그 자체로 멋진 상상력의 과즙이지만, 그 신화를 낳은 우리네의 모질고 팍팍한 삶은 어떠한가. 산과 물이 가로막는 것보다 더 여실하게 와 닿는 고립감이나 절연감은 삶의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이라 해서 그것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작가는 '산역'에서 이젠 친구의 부인이 된 자신의 옛 부인을, 혹은 아버지의 친구를 진짜 아버지로 둔 그녀를 이러한 신화의 원형에서 만나는 여성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흔 아홉 길 구절양장 같은 대관령 옛길을 거닐면서, 낯모르는 사내의 묘자리를 봐주고, 그 사내가 알고 보니 자신의 아비였음을 알았고, 그 아비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걸었을 그녀의 허청허청한 걸음을 생각한다.

▲ 해갑청 색깔로 넘실거리는 바다.
ⓒ 최삼경
이 소설은 산을 이야기 하나 그 주제는 자명하다. 해갑청의 청록색이라 표현되는 바다, 그것이다. 그렇지만, 바다도 늙는 것일까. 시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 아래로 복속시킨다. 아무리 빛나고 찬란한 것이라도 시간의 무량함 앞에서는 지레 질려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시간은 일테면 모든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콘베이어 벨트를 운행시키는 셈이다. 하여 한때는 해갑청의 명료한 청록색이었는지는 모르나 지금은 그저 담청색, 깊이를 모르겠는 무덤덤이 있을 뿐이다.

영동과 영서를 잇는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굴령'이라고도 불렀다는 대관령 고개는 지금 한창 가을을 맞기 위한 준비에 분주하다. 저 멀리 소설 속 사내가 그리워했던 바다는 여전히 넘실거리고,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버려진 무덤만큼 고적감이 느껴지는 것이 있을 것인가. 다만 주검 혹은 무덤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꿈과 회한과 삶의 의미를 준엄하게 묻는 하나의 의문부호이다. 산다는 것! 그 비의가 무엇이냐고 하는….

덧붙이는 글 | 10월 12일 <강원도세상> 116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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