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항쟁', 그것은 80년 광주를 무장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서곡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건대항쟁 20돌'을 맞아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그 일환으로 건대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보는 공개토론회가 18일 밤 서울 건국대에서 '10·28 건대항쟁 2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참석 인원이 너무 적어 토론회장이 썰렁했지만 대신 분위기는 시종 진지했다.
토론에 앞서 주제발표에 나선 정형곤 전 애학투련 조국통일분과위원장(당시 서울대 자민투 위원장)은 "해마다 이 날이 오면 당시의 치열했던 투쟁을 기억하게 된다"며 "역사의 한 갈피에서 함께 싸웠고, 함께 희생하고 또 함께 성취했던 동지들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정 전 위원장은 "건대 항쟁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재집권 음모 한가운데서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투쟁이며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잠재된 열정을 자극한 소중한 역사"라면서 "우리를 공격하고 탄압했던 전두환 정권의 광기는 이듬해 6월항쟁을 거치면서 종말을 고해갔다"고 회고했다.
"파쇼와 타협 없다, 신민당은 투쟁하라!"
건대항쟁이 일어난 1986년 10월은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두고 전두환 정권의 재집권 음모가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그해 12월 전두환 정권은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 이민우를 포섭하여 이른바 '이민우의 내각제 구상'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민우 구상'과 전두환 정권의 호헌 조치는 국민의 직선제 열망이 분출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정 전 위원장은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던 1985년 2·12 총선을 통해 표출된 민심은 이미 전두환 정권 교체로 방향을 지어 가고 있었고, 그 대안으로 직선제가 유력하게 제출되고 있었다"며 "전두환 파쇼정권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국민이 직선제를 택한 것은 매우 지혜롭고 유효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정 전 위원장은 "건대항쟁을 이끈 단위는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으로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 운동체는 대중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다"며 "당시 애학투련은 반공이데올로기 분쇄라는 매우 공격적인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반공'이 국시이던 당시 반공이데올로기 분쇄 투쟁은 매우 모험적인 전술이었다.
이어 정 전 위원장은 "군사정권의 재집권 무기는 역시 반공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 즉 북한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며 "우리의 행동이 북을 이롭게 한다는 정권의 논리 때문에 반공이데올로기 분쇄 투쟁은 매우 어려운 전술이지만 역사가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기록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밝혔다.
"건대항쟁은 6월항쟁의 뿌리"
특히 정 전 위원장은 "건대항쟁은 저항정신이 현실운동으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차이가 집중적으로 응축된 역사적 지점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면서 "독재정권과 민주화, 미국과 자주화, 그리고 북한과 통일이라는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에 대한 뒤섞임 속에서 건대항쟁이 발현되었다"고 평가했다.
1986년 3월 18일, 서울대학교 자민투 산하 반전반핵투쟁위원회 첫 집회에서 '반전반핵 양키고홈'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는 1985년 서울의 미 문화원 점거 농성으로 미국 문제가 처음 제기된 이후 보다 공격적인 반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정 전 위원장은 "미국이 광주민주화운동을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을 후원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미국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전 위원장은 "현재 북핵 문제로 촉발된 미일 군사체제 구축은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이 되고 있다"며 "따라서 한중 공조체제의 필요성과 북한을 빠르게 설득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위원장은 끝으로 "건대 항쟁은 6월 항쟁의 뿌리"라면서 "만약 건대 항쟁이 없었다면 6월 항쟁의 모습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