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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영화제 상영작 <내 마음은 조롱박>의 송현숙 감독.
재외동포영화제 상영작 <내 마음은 조롱박>의 송현숙 감독.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인터뷰를 위해 18일 경복궁 옆 학고재를 찾았을 때 그녀는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빴다.

재독화가 송현숙(54)씨. 지금은 화가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24년 전 스무살의 나이로 독일로 건너갈 때 신분은 간호보조원이었다. 이번 한국 방문 때는 '감독'(자신은 쑥스러워했지만)이란 직함이 덧붙었다.

송현숙 감독은 20일부터 열리는 '제2회 재외동포영화제'(주최 지구촌동포연대)에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필름에 담은 <내 마음은 조롱박-아주 작은 이야기(1995)>를 선보인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간호사에서 화가로, 그리고 다큐감독까지 그녀가 걸어온 길이 궁금했다.

"홀로 시신을 지키며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었다"

뒤로 동여맨 생머리, 옅은 회색과 갈색의 생활한복, 어눌한 남도 사투리,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연방 손사래를 치며 어색해하는 모습. 그녀는 유럽에서 활동 중인 화가보다는 고향 전남 담양 무월리에서 막 올라온 촌 아낙에 더 가까웠다.

-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간호보조원 교육을 받은 뒤 1972년 독일로 갔다. 집안이 그리 어렵진 않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공부도 좀더 하고 싶었다."

독일행 비행기에는 각기 사연이야 다르겠지만 비슷한 설렘과 두려움을 안은 간호사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낯선 땅에 도착한 그녀는 '병원'이란 간판조차 없는 조그마한 곳에 배치됐다. 하룻밤 자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과에서 일했는데, 말도 안 통하니까 그저 연고 발라주고, 체온기 나눠주고, 밥도 떠넣어주고, 그런 일들을 했다. 한국에선 환자 가족들이 병원을 찾아 도와주곤 하는데 거기는 간호사들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문화적 차이도 있었지만 육체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찾는 가족 없이 홀로 병실에서 시신을 지킬 때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여야 했다. 66년부터 76년까지 정부 차원에서 독일에 공식 파견한 간호사는 1만200여명. '3년 의무계약'이 끝난 뒤 절반 정도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남기로 했다. 계속 직업을 갖고, 공부도 하고 싶었다.

송현숙 감독
송현숙 감독 ⓒ 오마이뉴스 남소연
"3년 근무를 한 뒤 병원을 바꿔 1년 동안 더 근무했다. 정신병원에서 밤 근무를 했는데 틈틈이 일기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니 정신적으로 위로가 많이 됐다. 그때 그린 그림들을 모아 미대에 지원했는데, 다행히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함부르크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대학에서 배운 건 단지 미술만이 아니었다. 60년대 학생운동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던 대학에서 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녀의 정치의식도 깨어났다.

재독한국여성회에 가입, 파독 간호사들의 인권 옹호를 위해서도 힘쓰는 한편 '유신정권'에 반대하며 민주화활동에도 참여했다. 베트남전쟁 반대시위에 앞장서는 등 독일의 비판적 지식인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다.

"민주화운동단체들과 관계는 가졌지만 그래도 70년대에는 앞으로 안 나서고 주로 책만 보고 그랬는데…. 광주항쟁을 보면서 무서움을 넘어섰다."

<내 마음은 조롱박> 첫 촬영시 입국 거부당해

84년, 그녀는 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전남대로 유학을 왔다. 독일에서는 채울 수 없었던 동양화와 한국미술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미술을 하면서도 한국화가라고는 김홍도와 솔거밖에 몰랐다."

12년만의 귀국이었다. 그러나 고향땅을 찾는 대신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에서의 민주화활동 때문에 귀국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또 독일로부터 지원을 받기에도 더 유리해서…. 하지만 마음을 독일식으로 바꾼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다."

그녀는 80년대 광주항쟁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등 고국의 치열한 현실을 연필이나 수묵 드로잉 작품 등을 통해 그려냈다.

- 화가로서 이번 영화제에 출품한 <내 마음은 조롱박>을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바로 위 오빠가 있었는데, 농사를 짓다가 펌프에 전기 감염돼 돌아가셨다. 충격이 컸다. 한참 뒤에야 귀국해서 오빠를 위한 씻김굿을 했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우리들의 문화가 새롭게 느껴졌다. 처음엔 사진으로 찍었는데 소리나 움직임을 남길 수 없어 영상으로 담기로 했다. 돌아가신 오빠도 배우가 되고 싶어했는데 영혼이나마 카메라에 앞에 서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92년 처음 찍기 시작해 완성까지는 3년이 걸렸다. 애초엔 91년에 작업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민주화인사들과 어울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지만 공항 밖을 나서지 못한 채 하룻밤을 보낸 뒤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독일에서 상영된 <내 마음은 조롱박>은 독일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독일 헤센주 영화상을 수상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화가 서로 다른 게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 제목의 '조롱박'이 나타내는 의미는.
"한국에선 조롱박 하면 무엇을 담고 서로 나눌 수 있는 도구로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닌데…. 나 역시 연필화 작업을 할 때 심장을 하트 모양 대신 조롱박처럼 표현했고. 그런데 독일어로 조롱박(Flasche)이라고 하면 뭔가 야무지지 못하고 어리숙한,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다. 독일인들이 제목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단어조차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다른 문화를 모른다고 그냥 거부해버리면 더불어 살기 어렵다고 얘기하곤 한다."

"이제 다큐는 끝, 다른 사람이 작업 이을지도"

그녀는 이어 <회귀(回歸)> <집은 어디에> 등의 연작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문화를 그려낸 자전적 다큐 3부작을 완성했다. 전시회 때는 다큐 영상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회화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게 했다.

<내 마음은 조롱박>에 나오는 송현숙 감독의 간호사 시절 모습
<내 마음은 조롱박>에 나오는 송현숙 감독의 간호사 시절 모습 ⓒ CNFF
- 다음 작품 계획은 있는지.
"이젠 다큐 작업은 안하려고 해요. 작업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만만치 않고…. 또 혼자 작업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해야 하니까 그림 그리기에도 시간이 나지 않고…. 아마 영화에 관심 있는 아들이 작업을 이을지는 모르겠다."

이번 그림 전시회는 영화제가 끝난 뒤 27일부터 11월 9일까지 서울 소격동과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린다. 한국에서 세번째 갖는 개인전이다. 주제는 '단숨에 그은 한 획'. 최근 작품을 중심으로 회화와 드로잉 등 약 50점이 전시된다.

인터뷰를 진행한 곳 바로 옆에는 '고무신 무더기 위에 13획'이란 템페라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엔 설명이 덧붙여있다. "200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기념일에 그림. 일제 강점기에 정신대로 끌려가 성적 노예로 수난당한 여성들을 기억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한다."

이태호 교수(명지대 미술사학)는 이번 전시회에 대한 소개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 시절 고향 무월리의 추억, 1972년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되어 겪은 문화적 충격, 그 이후로 외국 생활의 낯설음과 외로움, 그 고통스런 시련 가운데 생존의 방식을 그림에서 찾아 지금에 이른 행적이 필획 하나하나에 묻어난다. 그 때문에 송현숙의 그림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공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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