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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숨소리가 불규칙한 신태감을 지켜보며 잠잘 생각을 포기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의심스런 인물이 떠오르자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한 곳으로 달려갔다. 바로 능효봉이 머물도록 배정된 방이었다.
드르륵---
문을 열었지만 방은 어두웠다. 두 명이 자고 있었다. 낮게 코 고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렸지만 능효봉은 없었다. 분명 능효봉은 이 방에서 같이 자고 있어야 했다.
'이 자식이 벌인 일일까?'
무리한 추측일 수 있었다. 그놈이 이 운중보에 어떤 연관이 있어 또 한 명의 인물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신태감을 노린다면 이 안 바로 청룡각 내에서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그 기회를 노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는 문을 닫고 다시 신태감이 있는 방으로 향하는 순간에 나무 욕조를 들고 힘겹게 끌다시피 다른 시녀 한 명과 함께 가져오는 홍교와 마주쳤다. 홍교 옆에 있는 시녀는 당화(棠花)란 아이였는데, 양 볼에 홍조를 띠고 눈매가 가늘어 은근하게 색기(色氣)가 흐르는 시녀였다.
"혹시 이곳에 있던 능효봉이란 자를 보지 못했느냐?"
그의 물음에 홍교는 고개만 숙이고 있고, 당화란 시녀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그분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까 그… 서당두란 분의 방으로 가는 것 같았사옵니다."
문제였다. 능효봉이란 놈이 자꾸 눈에 거슬리고 있었다. 이 운중보에 들어와 그놈을 처음 본 순간부터 동창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기분 나쁜 무언가 있었다. 그는 급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욕조까지는 필요 없었는데…, 하지만 이왕 가져왔으니 그것을 방안에 들여다 놓고 따뜻한 물을 채우거라. 지금 태감께서 주무시니 되도록 조용히 하도록 하고…."
"알겠사옵니다."
홍교와 당화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녀들의 대답은 이미 대청의 한쪽을 돌고 있는 경후의 등을 울리고 있었다. 경후는 급히 좁게 뻗어있는 마루를 지나 서교민의 시신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조용했다. 창문은 아직 열린 채였고, 탁자 아래 비스듬히 누운 서교민의 시체가 본래대로 있었다.
"………!"
헌데 침상 쪽에서 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휘장이 늘어져 있어 모두 보이지는 않았지만 침상 위에서는 누군가 자고 있었다.
"이 놈이…!"
이때만큼은 경후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침상으로 다가가면서 그 침상 위에서 자고 있는 인물이 능효봉 임을 알았다. 그는 침상 곁으로 다가가 치솟는 노화에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능효봉의 뺨을 갈겼다. 아니 갈기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이 뺨을 갈기는 경쾌한 소리는 없었다.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 능효봉의 몸은 아주 자연스럽게 돌아누워 있었다. 경후의 눈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그의 발이 벽 쪽으로 돌아누운 능효봉의 허리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발길질은 능효봉의 허리를 차지 못했다.
퍽---!
어딘가 차기는 했지만 그것은 침상 모서리였다. 그의 발길질은 기이하게도 몸을 구부리는 능효봉의 발목에 의해 옆으로 비켜나가게 되고 침상모서리에 그의 발이 아닌 정강이뼈가 부닥치는 바람에 비명을 질러야했다.
"억---!"
나무로 각이 진 침상모서리에 정강이가 부닥쳤으니 한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다. 아마 정강이뼈가 상했거나 최소한 살이 벗겨져 피가 나올 것이었다. 헌데 더욱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의 신음에 잠이 깬 듯 부스스 일어나는 능효봉의 능글능글한 얼굴이었다.
"어…, 첩형나으리께서 이 방엔 왜 또 오셨소? 뭔 일 있었소? 왜 죽을상이요?"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말이었다. 이 자식은 다 알면서 저러는 것이다. 경후는 정강이에서 퍼지는 아픔을 삼키며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는 자네는 왜 이곳에 있는 겐가? 시체가 있는 방에서 잠이 오던가?"
그 질문에 능효봉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조용하오. 조사도 끝났겠다, 시신이 있는 방이니 아무도 오지 않을 것 아니오. 나는 본래 다른 사람과 같이 방을 쓰는 것을 싫어하오. 특히 코 고는 사람과는 같이 잘 수가 없었소."
정말 괴상한 놈이었다. 코 고는 소리가 싫어서 시체가 아직도 멀쩡하게 놓인 방에 와 잠을 자다니…, 아무리 간담이 크다고 해도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네 아까 함곡선생의 조사를 받은 이후 청룡각을 벗어난 일이 있나?"
"없었소. 나 역시 피곤해 일찍 자려고 내 방에 갔는데 한 사람이 코를 고는 것 아니겠소?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하다가 이 방을 생각해 낸 거요. 헌데 첩형나으리께서 또 단잠을 방해하는구려."
경후는 능글맞게 대답하는 능효봉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머리끝까지 노화가 치솟아 올랐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자의 무공은 그저 호신 정도의 무공을 익힌 자신과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지금 신경질을 내 보았자 자신의 말이 먹힐 상대도 아니었다. 나중에 이곳을 나간 후 단단히 치죄를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는 몸을 홱 돌려 그 방을 급히 나섰다. 재수 없는 저 능효봉이란 놈과 더 있다가는 울화가 치밀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헌데 말이다. 그가 신태감의 방으로 돌아온 순간 기괴한 광경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방안이 온통 수증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방문을 닫지 않은 채로 창문을 모조리 열었다. 얼마나 뜨거운 물을 가져왔으면 수증기가 방안에 꽉 찰 정도인가 말이다. 나중에 시녀를 혼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증기가 어느 정도 걷히고 그의 눈으로 나무욕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비명을 질렀다.
"아--악---!"
욕조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다. 욕조에 들어 있는 것은 오직 벌거벗겨진 신태감의 몸뚱아리로 추정되는 처참한 시신 한 구였다. 온몸이 데인 듯 새빨갛게 변한 채 온몸이 흉측한 수포(水疱)로 덮여있는 사람 형상의 시신.
그것은 분명 펄펄 끓는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온통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오른 수포로 인하여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아마 옆에 놓인 옷이 아니었다면 신태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눈가의 근육에서 시작된 경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무너지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떠한 일이 닥쳐도 당황한 적이 없었던 경후라도 이 사건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빈 느낌이었다. 혼절한 것과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돌연 미친 듯 일어나 급히 전서(傳書)를 써 내려갔다. 충격을 받아 혼절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일은 가장 시급하게 알려야 할 사안이었다. 급하게 써 내려간 전서를 꼬깃꼬깃 접어 전서구(傳書鳩)의 다리에 묶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일은 동창의 인물이라면 어떠한 급박한 순간이라도 해야 할 일이었다. 죽는 순간에도 지켜야 할 규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혼절하듯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이 운중보 내에서 왜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누가, 무엇을 노리고 이런 사건을 벌이는 것일까? 아니 흉수는 동일인인가? 아니면 우연히 겹쳐져서 일어나는 사건일까? 의문을 안은 채 운중보에서의 첫째 날이 이렇게 지나고 있었다.
(1권 完)
덧붙이는 글 | 1권이 끝났습니다. 게시판에 인사말씀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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