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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낙월도 앞에 정박중인 멍텅구리배
ⓒ 낙월면사무소
다시 가고 싶은 섬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뱃길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다시 가고 싶을까. 그 곳에는 섬사람들의 애잔함이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달이 떨어지는 섬이라 붙여진 '낙월도'. 주민들은 '진달이'라고 불렀다. 아름다운 이름에는 그들의 삶이 깃들어있다.

한때 팔도에 있는 배들이 모여들어 돈을 실었다는 칠산바다. 그러나 지금은 간간이 새우와 꽃게를 잡기 위해 떠 있는 부표들만 깃발을 나부낄 뿐이다. 영광에서 출발해서, 바다 주인행세를 톡톡히 하는 칠뫼를 뒤로 하고 잠시 갈매기에 눈을 맞추다 보면 섬에 다다른다.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상낙월' '하낙월'이라고 부르지만, 이 곳에는 '뽕나루' '아랫데미' '웃데미' '재계미' '큰몰' '작은몰' 등 작은 마을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마을 골목골목을 지나다 보면 색이 바랜 상점 이름에서 다방과 여인숙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한때 이곳에 10여 개의 다방과 술집으로 북적대던 때가 있었다. 그 생채기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배 한 척에 주민 100여 명이 먹고 살았다

▲ 상낙월도의 모습
ⓒ 김준
낙월도가 이처럼 번성한 것은 젓새우잡이 때문이었다. 한때 낙월도 인근 해역에서 잡히는 젓새우는 전국 새우젓시장의 50%를 차지해 가격을 좌우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 '멍텅구리배'라고 불렸던 새우잡이배들이 1980년대에는 100여척에 이르렀다.

그때 낙월도는 돈으로 흥청거렸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이곳에서 생산하는 새우젓이 연간 6억여 원이나 됐다. 소득이 높은 부촌이었다. 인생의 쓴맛을 본 팔도 사내들이 절망과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았던 곳이었다.

멍텅구리배는 일이 고되기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너 말 안 들으면 새우잡이배에 팔아버린다'는 농담이 생겼겠는가. 이렇게 일이 고되다보니 뱃사람을 구하는 것이 '일'이었다. 물때에 맞춰 하루에 4번씩 그물을 걷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조각난 새우잠을 자야 했다.

모기장처럼 촘촘한 70~80m에 이르는 그물을 걷어올리는 일은 만만치 않다. 특히 멍텅구리배와 그물이 이동하지 않도록 지탱하는, 10여m는 족히 될 2톤에 달하는 닻을 끌어 올릴 때는 모든 사람이 용을 써야 바다 속 펄밭에 처박힌 것을 뽑아낼 수 있었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물에 잡힌 것들은 새우만 아니라 해파리·반지·조기·갈치새끼·갯가재 등이다. 새우만 추려내고 쓸 만한 잡어들을 골라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운반선이 뭍으로 잡어들을 가져오면, 낙월도에 남아있는 여자들이나 노인들이 이 일을 맡아서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이 힘들다 보니 멍텅구리배를 타는 사람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뜨내기가 대부분이었다. 망망한 바다에서 조류에 따라 움직이며 햇살을 이겨내야 했던 이들을 관리하는데 구타와 협박이 동반되기도 해 새우잡이배를 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보이던 사람이 사라지면 새우잡이배에 팔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 새우잡이 작업 당시의 멍텅구리배
ⓒ 낙월면사무소
▲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중인 낙월도 멍텅구리배
ⓒ 김준
멍텅구리배에 타는 사람은 선장(사공)·영재(영자)·수동무·동무·화장 등 총 5명이다. 선장은 새우잡이를 총지휘하는 사람으로 물때에 따라 그물을 넣고 빼는 시기를 알아야 한다. 영재는 뱃살림을 맡고, 수동무와 동무는 일반선원으로 그물을 올리는 일은 물론 잡일도 맡는데 수동무가 더 인정받는 사람이다.

화장은 요리를 담당했다. 등급에 따라 월급도 차이가 있다. 멍텅구리배 한 척이면 주민 100여명이 먹고 살았다. 새우잡이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는 낙월도에 유동인구만 해도 1000여명이 훨씬 넘었으며, 배를 타는 사람만 해도 400~500명은 되었다.

새우잡이 특성상 한 번 바다에 나가면 선주가 배를 가지고 가서 데려오지 않는 한 배에 머물러야 했다. 뭍으로 출입하는 것도 통제되고 먹고 입는 것도 외부에서 공급해 줘야 했다.

당시 뱃길은 지금처럼 영광과 연결되지 않고, 지도와 목포로 이어졌다. 대형철부선에 젓새우 독을 가득 싣고 이동했다. 목포에 내로라는 객주들이 선주에게 좋은 새우를 사기 위해 각종 선심을 베풀기도 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고기잡이, 멍텅구리배

▲ 갯벌에 묻힌 2톤에 달하는 닻이 낙월도에서 찾은 멍텅구리배의 유일한 흔적이다.
ⓒ 김준
▲ 해양유물전시관 앞 마당에 전시된 멍텅구리배의 닻
ⓒ 김준
1987년 태풍 셀마로 12척의 배가 침몰하고 53명의 큰 희생을 치른 후 배들은 보상절차를 거쳐 폐선되었다. 어족보호와 사고예방을 위한 연근해 어업구조조정이 이유였다. 멍텅구리배의 규모는 10~16톤으로 크기가 다양하다. 주로 목포에서 배를 지어왔으며, 건조비용은 1990년 초반 1200여만 원에 이를 정도로 거금이었다.

멍텅구리배는 새우잡이만이 아니라 실치·실뱀장어 잡이에도 응용되고 있다. 스스로 물길을 가르며 이동하지 못하는 새우는 조류에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길목에 닻을 놓고 기다리며 잡는다.

배는 상자모양으로 투박하고 그물을 끌어올리기 수월하게 이물(배 앞쪽)이 뭉툭하다. 그물은 주목망처럼 자루그물을 배 양쪽에 설치한다. 그물 입구는 사람의 입술모양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수해(위쪽)와 암해(아래쪽)로 구성되어 있다.

낙월도에선 멍텅구리배를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목포의 해양유물전시관에 낙월도 멍텅구리배 한 척이 전시되어 있다. 멍텅구리배는 허가어업으로 '안강망어업'이다. 특히 멍텅구리배는 젓새우를 잡는 배를 말한다.

젓새우를 잡는 어업을 '해선망어업'이라 하는데 이때 해선(젓해, 배선)은 '젓을 담그는 배' 즉 '젓배'를 말한다. 경기도에서는 이를 '곳배'라고도 하며, 전라도에서는 '젓중선' '멍텅구리배'라고 부른다. 특히 멍텅구리배는 낙월도 주민들이 즐겨 사용하는 명칭이다.

멍텅구리배는 투박한 전통적인 한선을 개량한 배로 10~17톤에 이르는 무동력선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수산지>에는 낙월도 인근에서 백새우를 잡기 위해서 중선들이 몰려들었고, 잡은 새우를 판매하기 위해 출매선(出買船, '상고선'이라고도 함)이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칠산어장에서 새우잡이를 하고 있는 닻배
ⓒ 김준
1970년대 초반까지 뱃사람들의 꿈과 이상향인 '칠산바다' 조기잡이를 이야기할 때도 '중선배'는 곧잘 등장한다. 중선배는 그물만 바꾸어 새우를 잡기도 하고 조기를 잡기도 했다. 조기잡이 중선배는 돛을 달고 노를 저어 이동한 반면에 새우잡이 중선배는 멍텅구리배로 예인선이 이동해야 움직일 수 있는 배를 말한다.

해선이라는 말이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20세기 초 경기도 덕적도 인근 해역의 새우잡이를 기록한 <한국수산지>다.

그 기록에는 "봄과 가을에 주로 작은 새우를 잡는데 어획된 새우의 일부는 건조하고 대부분은 젓갈을 만든다, 해선은 젓항아리를 준비하고 있다가 어획물을 직접 젓갈로 담근다. 그래서 해선이라고 이름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다에서 새우를 잡은 즉시 선상에서 소금과 섞어 젓을 담는 배라는 것이다. 1820년대 서유구가 지은 어류지 <난호어묵지>에서도 젓을 담을 독과 소금을 싣고 다니다 새우를 잡으면 바로 젓을 담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멍텅구리배 사라지고, 진달이 되어 버린 섬

▲ 새우잡이를 마치고 낙월도 포구에 정박한 선박
ⓒ 김준
낙월(落月)도를 '진다리(진달이)'라 부르는 데는 사연이 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운명이 다했을 무렵 백제의 왕족이 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하다 달이 지고 항로를 잃고 헤매다가 정착하여 붙여진 '달이 지는 섬'이다.

새우는 주민들의 '생명줄'이었다. 그 덕에 그곳에 면사무소와 보건소를 만들고, 도로를 만들었다. 새우가 그렇게 나지 않았다면 누가 작은 섬에 관심이나 가졌겠는가. 남자는 선원으로, 여자는 새우 추리는 작업으로, 나이가 있으면 그물 손질하는 일로 일 년 내내 돈이 마르지 않았던 섬이었다.

걷어온 그물에서 새우를 추리며 얻은 밴댕이며 송어며 잡어로 담근 젓과 좋은 선주 만나 얻은 고기를 말려서 재미를 쏠쏠하게 봤던 주민들. 멍텅구리배가 사라지면서 당제도 갯제도 사라졌고, 학교는 폐교되고 사람들은 섬을 떠났다. 주민들의 생명줄, 목포와 연결되던 뱃길도 끊어졌다.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강도가 높고 색깔이 좋아 남도의 서화와 교환될 정도라는 묵석도 사람들의 등살에 더 이상 구경하기 힘들다.

멍텅구리배 보상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섬을 떠났고, 새우잡이와 새우추리기, 그물손질 등 잔 일에 기대어 살던 주민들은 칠산바다를 보며 고사리와 나물을 캐고, 산비탈을 일궈 고추와 깨를 심어 살아가고 있다. 요즘 새우잡이는 닻자망이나 팔랑개비배(개량안강망)가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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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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