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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7일 외교부에서 열린 국회 통외통위 국정감사에서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 '반미로 얼룩진 6.15 대축전'이라는 제목의 한 보수언론 기사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행사가 벌어진 2박3일간 광주는 완전히 해방구였습니다. 주체사상 선전 홍보물이 거리에 돌아다니고, 교육 현장에서까지 사상 주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김용갑 의원, 2006.10.26 통일부 국정감사 발언)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 (이희성 계엄사령관, 80.5.21. 5·18 당시 담화문)

"조평통 서기국장 안경호씨가 북측대표로 참석했고, 행사에 참석한 한총련, 범민련 등 몇몇 단체가 외세배격, 주한미군철수와 같은 북한주장을 대변하는 반미구호와 현수막을 붙이는 등 광주를 혼란에 빠뜨리고 국가정체성을 훼손한 것에 대해 비판한 것." (김용갑 의원, 2006.10.29, '광주시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29일 발표한 김용갑 의원의 사과문은 1980년 5월 21일 발표한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포고문에 "미안하다"라는 말을 얹은 것에 불과하다.

김용갑 의원에 의해 광주시민들은 다시 '부화뇌동자'가 됐고, 광주는 다시 '친북좌파가 날뛰기 쉬운 온상'이 되고 말았다. 광주항쟁이 특별법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까지 광주는 '내란의 도시'요, '폭도의 도시'요, '반란의 도시'였다.

겉으로는 간첩들이 광주를 선동했다고 했다. 최소한 담화문 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속으로는 달랐다. '민주화운동'이 아닌 '내란'의 책임은 전적으로 '광주시민'의 몫이었다. 더 나아가 전라도의 몫이었다.

'부화뇌동자'에게는 너무한, '좌익 곰팡이의 온상'이기에는 너무한 과도한 책임이요, 낙인이었다.

80년에도 "간첩이 선동했다"고 했다

▲ 지난 6월 14일 전남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6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서 어린이환영단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제 와서 김용갑 의원은 "광주 시민이나 광주 지역을 말한 것이 아니라, 행사를 지적한 것"이라 했다. 계엄사령관의 논법도 그랬다.

"순수한 여러분의 애국충정과 애향심이 이들의 책동에 현혹되거나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파탄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조속히 이성을 회복하고 질서유지에 앞장서 주시기 바란다"며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폭도와 분리될 수 있도록 협조를 기대한다"고 발표했었다.

김용갑 의원의 논법은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누군가는 김용갑 의원의 색깔론이 일관됐다고 이야기한다. 백보 양보해서 정치적 소신과 의도를 이해하며 그 정도는 양해할 수 있다고 하자.

광주 시민이 김용갑 의원의 발언에 진정으로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군사쿠데타세력의 논법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논리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악의적 논법으로 광주를 여전히 '좌파의 온상'으로 낙인찍는다. 참으로 괴롭고 슬픈 일이다.

절도 사건 일어나면 '절도 자유구'인가

1차적 낙인은 2차적 낙인을 낳는다. 아무리 항변해도 전과자에 대한 오해가 바로 그것이다. 낙인의 가장 큰 문제는 1차적 낙인이 잘못됐을 때이다. 군사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광주시민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시민의 이마에 '내란과 폭동과 좌파'의 낙인을 찍었다. 잘못된 1차적 낙인을 바탕으로 광주 시민들은 늘 그런 사람으로 낙인을 안고 살았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정지역에 대한 낙인이 곧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공화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어느 한 도시에 외지인이 들어가 조금 특별한 절도사건을 저질렀다고 하자. 어느 누구도 이를 두고 '절도 자유구'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광주에 대해서는 손쉽게 '해방구'라고 말한다. 낙인의 관행이 가져온 상습이다.

김용갑 의원은 사과문에서까지 "최소한 광주 시민들이 해방구가 되는 것을 막지 않은 부작위의 책임"을 전제한다. 필자가 아는 광주시민들은 좌익의 낙인에 몸서리 치는 사람들이다. 광주시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지난 6·15행사가 "좌익세력이 준동하고 국가공권력이 마비되는, 김의원의 표현대로 해방구가 되는 상황"을 결코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김 의원은 광주시민들이 그 정도의 판단능력과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는 걸까?

김용갑 의원 개인은 이번 발언으로 충분한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국감 과정에서의 '정치적 공방'과 '싸움질'만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광주는 해방구'라는 명제만 야사에 남는다. 진실의 햇볕은 별개의 몫이다.

내란죄 벌어지던 때, 그는 안기부 기조실장이었다

▲ 지난 5월 18일, 2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맞아 광주광역시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신들의 선배이자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 역할을 했던 윤상원 열사를 참배했다. 이들 학생들은 매년 윤 열사에게 종이학 1천마리를 접어 선물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김용갑 의원은 1980년 11월부터 85년 사이 국가안전기획부 기조실장을 지냈다. 군사쿠데타세력의 통치행태는 군사정치요, 정보정치였다. 지금도 정보기관의 핵심은 기조실장이다.

12·12, 5·18사건에 대한 항소심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내란죄의 범행이 종료된 시점을 "87년 6·29선언시까지"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1981년 1월 23일을 내란죄의 종료시기"라고 해석했다. 내란죄가 계속되고 있던 시기에 김용갑 의원은 안기부의 기조실장이었다.

이 때의 안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 등 내란죄 조작사건에 대한 수사의 사실상 책임을 맡고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끌려간 곳은 전부 다 국가안전기획부였다. 불법구금과 반인도적인 고문이 가해진 것도 바로 그 곳이었다.

그 국가안전기획부에 근무한 사실이 공적으로 인정받아 김용갑 의원은 두 개의 훈장까지 받았다. 1981년 6월 10일 3등급의 보국훈장천수장을 받았으며, 1985년 3월 13일에는 2등급인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81년의 훈장은 국가안전기획부 창설 제20주년 기념 유공이 명분이었고, 1985년 받은 훈장은 "숭고한 애국심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직무를 정려하다가 퇴임하는 기념"으로 받았다. 훈장을 받을 정도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투철한 사명감으로 임한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훈장 받을 정도로 투철하게 일했던 역할은?

물론 김용갑 의원은 12·12와 5·18관련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적은 없다. 김 의원은 자신은 직접 그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김용갑 의원만큼은 최소한 광주를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정치적·도덕적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쿠데타의 수괴인, 내란목적살인죄의 주범인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명령복종관계로 종사했던 이상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김 의원의 생각은 이와는 정반대다. 2004년 총선 이후 한나라당 연찬회에서는 5·18묘역을 참배할 것인지의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5·18이 법적으로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지만 정서적으로는 동의 못하는 사람이 많다" (2004년 8월 23일 한나라당 의원총회)

바로 김용갑 의원의 발언이다.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12·12사건은 군사반란으로, 5·17비상계엄확대조치는 내란으로 평가받았고,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음에도 아직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김 의원이다.

▲ 지난해 5월 12일 한나라당 중도성향 '국민생각' 소속 의원 7명이 국립5·18묘역을 참배했다. 강재섭 원내대표가 묘역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며 비석을 유심히 보고있다.
ⓒ <광주드림> 안현주 기자
좀더 진실한 사과가 필요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지 우리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한 때는 광주시민들이 내란음모죄의 주체이거나, 최소한 폭도였다.

시대가 바뀌어 그나마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 끝내 쿠데타 주역들을 법정에 세웠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건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는 그들만 안다. 광주시민들은 모른다.

이런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은폐가 결국은 오늘날의 유사범죄행위로 이어진다. 개인의 명예가 소중한 만큼, 광주시민과 광주라는 집단명예도 중요하다.

좀 더 진실한 사과가 필요하다. 참으로 괴로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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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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