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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길만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은 여러 가지다. 인생도 그렇고 길도 그렇다. 더구나 산길이라는 것은 일반 도로나 마을을 연결하는 길보다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고 찾기도 어려운 법이다. 일반적인 길이 사람과 차가 다니는 것이라면 산길은 짐승도 가고, 풀도 가고, 산죽도 가고, 사람도 가기 때문이다.
중산리에서 라면에 배를 채운 우리는 중산리를 빠져 나와 동당리를 지나 산길로 내원사로 가기로 작정했다. 사실 이 길은 넘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책에는 분명히 길이 표시되었기 때문에 나는 별 다른 고민 없이 산을 넘는 길을 선택했다.
중산리에서 동당리로 가느다란 산길이 이어진다. 아래쪽 계곡에 놀러온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계곡과 산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길 옆으로는 무속인들의 집이 보였다. 그들에게 내원사로 넘어가는 길을 물으니 아는 이가 없다. 모두 지리산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라 산길을 모르는 것 같았다. 산길을 넘어가려면 산과 좀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생각에 가느다란 외줄기 산길을 더 깊이 들어갔다.
계곡 근처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봉기라는 사람이었는데 밀짚모자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집은 진주라고 했다. 젊어서부터 산이 좋아 지리산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찾고 찾다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여기도 100%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고 60% 정도밖에 안 들지만 그래도 여기서 당분간은 적을 두고 진주와 지리산을 오가는 생활을 할 계획이란다.
그에게 내원사 넘어가는 길을 물으니 여기가 내천잠이고 조금 더 가면 외천잠이 있는데 거기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는 것이다. 이 동네에서는 새해 첫 날 해돋이를 내원사 넘어가는 산에서 한다면서 길이 있기는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일출이 천왕봉 일출과 비슷하다고도 했다.
지리산이 좋아서 지리산 여기저기를 돌아보다 이제야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는 이씨는 얼굴 가득 행복해 보였다. 그는 한때 헬리콥터를 임대해서 지리산을 보고 싶을 정도였지만 돈이 없어 그렇게는 못하고 지리산 그 넓은 골짜기를 발로 걷고 걸어서 이 동네를 찾았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고 싶은 곳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곳, 교육 서비스가 잘 되는 곳, 투자 가치가 높은 곳을 선택한다. 또한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한 선택보다는 명예, 권력, 부를 위한 삶을 선택한다. 그러면서 말로는 행복하고 싶고, 어디서 살고 싶다고 한다. 100번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욕심을 버리고 살고 싶은 곳에서 행복한 삶을 선택하면 될 일을 말이다.
내원사 가는 가파른 산길을 헤매다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조카와 나는 다시 외천잠을 찾아 떠났다. 외천잠에 도착하니 산으로 오르는 길 하나가 보인다. 그 전에도 몇 개의 길이 있기는 했지만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 여러 개의 산 길 중 가장 입구가 넓은 곳을 선택했던 것이다. 길은 처음에 넓더니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한 여름의 열기는 산 속에까지 전해져 땀은 뚝뚝 떨어지는데 반바지 차림의 우리를 산죽을 잘라 놓은 것들이 장애물처럼 우리를 가로막는다.
더구나 산죽이 다리를 공격하던 길까지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곧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것이 아닌가? 뒤따라오는 조카는 말없이 따라오고 있지만 앞서가는 나나 뒤따르는 조카나 키 넘는 산죽처럼 답답했다.
"정욱아 우리 여기서 내려갈까?"
"어떻게 올라 왔는데 포기해 삼촌!"
"그래 좀 더 가보자."
산 속을 헤맨 지 2시간이 지나 어느덧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갈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고개를 들어 산 위를 보니 정상이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길은 보이지 않지만 조릿대 숲을 손으로 헤치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이번 지리산 도보여행에서 3번째 길을 잃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편에는 올라가면 길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는 했지만 혼자 가는 길이 아니고, 조카의 체력을 감안할 수 없다는 점과 물통 속에 물이 텅 비어 있다는 현실적인 조건 그리고, 오후 4시라는 시간이 내원사까지 가서 야영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길을 물었던 이봉기씨가 한 시간 반이면 넘어 갈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계속 올라 가보기를 결정했다.
산 속을 헤치고 올라가는 발 밑에 영지버섯이 보였다. 이런 깊은 산중에 영지버섯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우리는 산 정상을 향해 가쁨 숨을 몰아쉬며 올랐다. 다행이 조카는 씩씩거리면서도 그 험한 길을 쉬지 않고 따라왔다. 25kg 넘는 배낭을 메고 절벽처럼 가파른 산길을 그것도 키 넘는 산죽을 헤치고 올라가는 것은 그렇게 쉽거나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난관인 것이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위로 올라가면 산은 언젠가는 정상을 허락하는 법이다. 오후 5시 드디어 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올라가니 뚜렷하게 산길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고 마루를 잇는 길만 보인다. 우리는 내려가야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또 다시 무리수를 두었다. 한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했고 입이 바삭 바삭 타 들어갔기 때문에 속히 물을 먹어야 했다. 결국 산길도 아닌 길로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무작정 아래로 향해 내려갔다. 산죽이 없는 길이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듯이 말이다. 큰 고생을 해본 사람은 작은 고생은 고생처럼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둘 다 말없이 산길을 내려오는데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겨우 외줄기로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하나가 해결되면 다음 일도 쉽게 해결되는 법인지 물줄기가 시작한 지점부터 고로쇠 수액을 받는 호스라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라인만 따라가면 길이 나온다. 이런 것을 우리는 확신이라고 한다. 우리는 드디어 첫 민가를 발견했다.
길에 떨어진 수박을 게걸스럽게 먹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내려오니 내원사가 보인다. 야영장을 찾아 내려가는 데 차에서 떨어진 수박이 한 덩이 굴러다닌다. 조카와 나는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떨어진 수박을 주워들어서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수박 같았다. 세상이 이런 것이다. 배부르고 편하게 걸어 왔다면 차에서 굴러 떨어져서 반쯤 깨진 수박이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는가! 배도 고프고 물만 먹고 산을 하나 넘어 오니 굴러 떨어져 깨진 수박조차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내원사 계곡 근처에는 큰 야영장에는 휴가를 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처럼 배낭을 메고 온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통해 산행을 시작하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내원사는 오직 절과 계곡이 있을 뿐 지리산으로 더 깊이 들어 갈 수가 없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겨우 텐트 칠 곳을 발견하고 거기에 지친 몸을 뉘일 수가 있었다. 옆 텐트에서 산하라는 노래가 들린다. 지리산 산 속에서 듣는 산하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지리산 산하에서 그렇게 길고 긴 하루가 지났다.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길게 누운 이 산하는 여윈 몸을 뒤척이네
피고 지는 내 얼굴에 터질 듯 한 그 입술에
굵은 비가 몰아 치면 혼자 외로이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하얀 고개 검은 고개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
눈물 타령 웃음타령 휘어 감는 사랑노래
피고 지는 내 얼굴에 터질 듯 한 그 입술에
굵은 비가 몰아 치면 혼자 외로이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김병준 글·곡 '산하')
덧붙이는 글 | 농산물 살때 참거래 농민장터(www.farmmate.com)에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