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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의 문화사 < SMOKE >
흡연의 문화사 < SMOKE > ⓒ 이마고
17년 전 나는 담배팔이 소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방 문턱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가 가득 담긴 빨간 사각 플라스틱 바구니와 동전이 가득 든 빨간 뚜껑을 가진 납작한 양은 주전자를 옆에 끼고 테이블이라고 해봐야 4개 밖에 없는 조그만 식당 안을 바라보며 손님을 기다렸다. 코딱지만한 땅에 농사를 짓던 부모님이 도시로 나와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일이 바로 담배포가 붙은 작은 식당이었다.

손님이 뜸할 땐 담배들이 박스째 쌓여있는 2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다락방에 기어 올라가, 베개 대신 값싼 '청자'나 잘 팔리지 않던 '장미' 보루를 베고 누워 쓸데없는 몽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뿐인가 담배로 성 쌓기, 담배로 도미노 게임, 담배로 비석치기, 하여간 담배로 할 수 있는 놀이는 '피는 것'을 빼놓고 다락방에서 다 해봤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부터 시작된 담배와의 동거는 거의 3년 동안 계속 되었고, 집안 형편이 조금 풀려 일반주택으로 이사를 가서야 나는 담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나 자신이 기특(?)하게 생각되는 것이 그렇게 담배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한 대 땡겨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야 담배 피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선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어떻게든 끽연의 재미를 보려는 친구들이 주위에 많았다. 하지만 나는 신물나는 '담배팔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을 느꼈고 흡연가 대열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가끔 어머니 몰래 동전 주전자에서 동전을 꺼내 집 앞에 있던 오락실 컴컴한 구석에서 '엑스리온'과 '붐잭'을 했던 것과 소풍 갈 때 담배 두어 갑 '뽀려'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김밥과 과자 부스러기를 얻어먹었던 일은 음침했던 불량 소년의 과거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흡연에 대해선 무지했던 담배팔이 소년이 한 단계 발전해 끽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겠지만 군대 시절이었다. 땅개처럼 구르다 피는 담배는 단맛이 난다. 군대가 아니고선 느낄 수 없는 맛이다. 기본 보급품에 담배를 주는 이유가 달리 있지 않다. 담배 피는 낙이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군 생활을 하겠는가.

만약 전쟁영화 속에서 담배가 소품에서 빠졌다고 생각해 보자. 앙꼬 없는 찐빵까진 아니겠지만 그게 어디 제대로 된 전쟁영화가 될 수 있을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총알 쏟아지는 전장을 벗어나 한숨 돌리며 아무 말 없이 '럭키 스트라이커' 한 개비를 전우에게 권하는 장면을 기억해 보자. 담배가 등장하지 않고 "죽지 않았으니 우린 행운아야"라고 한다거나 뜨거운 눈빛(?)만 교환했다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림'이 나오질 않는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한 장면. 전쟁영화에서 담배는 빠질 수 없는 중요 소품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한 장면. 전쟁영화에서 담배는 빠질 수 없는 중요 소품이다. ⓒ HBO
담배팔이 소년, 군대에서 담배의 단맛을 알다

이제 과거사는 접고, 본격적으로 '흡연의 문화사' 공부에 들어간다. 책의 제목은 < SMOKE >. 부제가 '담배라는 창으로 내다본 역사와 문화-흡연의 문화사'다. 제목 중에 'O'는 담배연기로 만든 도넛 구름이다. 북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발랄하다.

디자인이 발랄한 것까진 좋은데, 책이 두껍다. 총 600쪽. 두꺼운 것 까진 좋은데 판형까지 크다. 248*176mm 크라운판이다. 어떻게 들고 다니란 말인가. 집에서 정독하라는 출판사(이마고)의 독자를 위한 배려(?)를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아~ 책읽기가 싫으면 원래 핑계가 많아지는 법이다.

자세잡고 슬슬 넘겨보니 책이 두껍기는 하지만 그래도 읽을 만하다. 심심치 않게 사진과 그림이 다수 전진 배치되어 있고, 담배에 대한 온갖 학설, 정설, 속설, 잡설, 기타 설들을 모두 모아 두었다. 담배에 약간이라도 흥미가 있다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담배에 정나미가 떨어진 사람일지라도 당신이 담배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심리적 경제적 등등의 이유'를 모두 이 책에서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고 다양하게 '담배'에 얽힌 잡다한 세상사를 모두 훑어 책을 만든 샌더 L 길먼씨과 저우 쉰씨 등 다수의 저자들에게 박수를. 얼마나 이들이 상세하게 조사했는지는 책을 사서 읽어 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겠다.

애연가에게 담배는 어떤 존재일까. 대다수 흡연가들에게 '기필코 끊어야만 하는 건강의 적'이지만 담배를 진정 사랑하는 이에겐 담배는 "외로운 사내의 벗이며 미혼남의 친구, 굶주린 이에게는 양식, 슬픈 사람의 원기회복제, 잠 못 이루는 이에게는 잠, 추운 이에게는 온기"( 213쪽)다. 맞다. 외로울 때 괴로울 때 피는 담배 맛을 무엇과 바꿀 수 있으리. 그런데 왜 담배는 외롭거나 슬플 때 외에도 계속 '땡기는' 것일까.

보건복지부가 도입하기로 한 담배갑 디자인. 담배의 부작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지만 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최근 여론조사에서 흡연자의 78.7%가 담배갑 경고문구가 효과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담배의 강한 중독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보건복지부가 도입하기로 한 담배갑 디자인. 담배의 부작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지만 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최근 여론조사에서 흡연자의 78.7%가 담배갑 경고문구가 효과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담배의 강한 중독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 보건복지부
바로 '니코틴' 때문이다. 담배의 주요 성분인 니코틴은 뛰어난 각성 효과를 지니는 동시에 중독성 약물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피는 첫 담배 속의 니코틴은 폐부를 찌르며 머리를 싸늘하게 식힌다. 자는 사이 떨어진 니코틴 수치를 다시 회복하라 뇌는 재촉한다. 아침 첫 담배는 가장 각성 효과가 크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니코틴 수치가 떨어지면 계속 뇌에서 재촉을 한다. "어서 담배를 빨아."

"담배 흡연자들에게, 적어도 하루의 첫 번째 담배에 함유된 니코틴은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가벼운 행복감, 에너지의 증가, 고양된 각성, 스트레스와 근심의 감소, 식욕 억제까지. 이 긍정적인 효과들 때문에 니코틴을 반복적으로 투여하게 되고, 이 반복적인 투여가 궁극적으로 뇌 메커니즘을 장기적으로 적응시켜 의존을 야기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 508쪽

결국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계속 흡연자로 남게 된다. 담배를 끊지 못하게 만드는 니코틴 의존성은 90% 이상의 흡연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금연을 실패하게 만든다. 금연을 시도하는 흡연자의 10-20%만 열두 달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견딜 수 있다. 이렇게 견디는 사람들을 우리는 '독한 X'라고 표현한다. 사실 금연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러워 배 아픈 것을 이렇게 돌려 말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담배보다 '훨씬' 나쁘다고 생각하는 대마초(마리화나)나 코카인, 헤로인의 약물 의존성이 니코틴 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이다. 니코틴의 약물 의존성을 80으로 본다면 헤로인은 35, 코카인 21, 대마초 11. 이 수치를 보고 담배 끊기를 포기했다면 좋아할 곳은 어디… 뻔하지 않은가. 담배회사와 정부, 그리고 병원뿐이다.

담배, 헤로인과 대마초보다 훨씬 중독성 강하다

100달러 위조지폐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소마. <영웅본색>에서 소마역을 맡은 주윤발은 담배피는 '남자의 로망'을 제대로 보여줬다.
100달러 위조지폐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소마. <영웅본색>에서 소마역을 맡은 주윤발은 담배피는 '남자의 로망'을 제대로 보여줬다. ⓒ 골든 하베스트
하지만 꼭 중독성 강한 니코틴 성분 때문에 담배를 피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담배를 피는 가장 큰 이유는 담배가 '남자의 로망과 느와르'를 상징하는 이미지기 때문이다(여성의 흡연에 대해서는 이 책 '담배 피우는 여성' 편을 보시길).

< SMOKE >를 번역한 이수영씨는 "21세기를 사는 많은 현대인들은 담배를 가난의 상징, 각종 질병과 사망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때 부와 지식의 상징으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던 담배는 오늘날 건강이라는 법정에서 과거에 밝혀지지 않았던 온갖 추악한 죄과를 폭로당하는 피고인 신세"라고 했지만. 남자들은 항상 멋있게 담배피기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내 또래 많은 친구들이 담배를 입에 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멋' 때문이었다. 1986년 <영웅본색>에서 100달러 짜리 위조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던 '소마 주윤발'의 멋진 모습에 완전히 제압당한 친구들은 아버지의 담뱃갑을 손대기 시작했고, 담배맛에 빠진 여러 친구들은 서서히 흡연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첩혈쌍웅> 넘어서 1990년대 초반까지 쏟아진 홍콩 느와르는 청소년 흡연 증가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강한 남자'를 표현했던 담배의 상징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소마 주윤발' 만큼이나 강한 남자의 포스를 뿜어내던 말보로맨도 더 이상 거친 황야를 누비는 멋진 카우보이가 아니다. 말보로맨은 이제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남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말에 올라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멋진 카우보이, 말보로맨을 기억하는가? 이 상징은 50여 년 동안 미국 광고를 주름잡으며 잠재적 흡연자들과 실제 흡연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새겼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흡연하는 이들은 멋지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하여 말보로맨에 도전했다. 담배를 피우며 서부인임을 자각하던 말보로맨은 이제 구취를 풍기는 침울한 사내가 되었다." -544쪽

<체 게바라 자서전 표지>. 시거를 문 체 게바라는 '혁명'을 나타내는 20세기 아이콘이 되었다.
<체 게바라 자서전 표지>. 시거를 문 체 게바라는 '혁명'을 나타내는 20세기 아이콘이 되었다. ⓒ 황매
그러나 담배가 침울한 사내의 상징이라고 잘라 말하긴 싫다. 왜? 그것은 바로 체 게바라가 있기 때문이다. 쿠바산 시거를 피우고 있는 체 게바라는 '혁명'을 의미한다. 심한 천식에 시달리면서도 시거를 즐겨 피웠던 체 게바라(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많다)의 모습은 20세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허름한 막사에서 시거를 물고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에선 날카롭게 날선 혁명가가 아닌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사나이의 고독이 읽힌다.

"담배를 피우며 나는 오래된 길을 따라 걸어 내 두려움의 익숙한 모퉁이에 이르렀다. 늘 죽음에 연결되어 있고, 혼란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무(無)'라는 느낌. 우리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아무리 확신에 차 죽음은 '무'라고 묘사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체 게바라 자서전>(황매), 329쪽

진정한 담배 피우는 멋을 아는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다.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내 두려움의 익숙한 모퉁이'를 담배를 피우며 걷는 그 느낌을 담은 문장이 겉멋으로 담배를 피워본다고 해서 나오겠는가. 세상의 부조리함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그에게 향기로운 시거는 잠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볼리비아 밀림에서 처연하게 죽어간 혁명가의 자서전에서 옮겨온 이 절절한 문장을 비틀어 보니 죽음과 고통을 멍에처럼 가지고 다니는 존재가 담배라는 생각이 든다. 끽연의 즐거움은 한 순간 담배 연기로 사라지고, 뇌 세포를 갉아먹는 니코틴과 폐에 들러붙는 타르는 죽음을 재촉하는 신이 만든 '연옥(煉獄)'이니….

혁명가는 저항의 동반자로 담배를 택했으나 이 글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은 모두 건강을 위해 '금연'하시길. 그런데 마침표를 찍고 보니 왜 이렇게 담배 생각이 간절한 것인지.

흡연의 문화사 - 담배라는 창으로 내다본 역사와 문화

샌더 L. 길먼.저우 쉰 지음, 이수영 옮김, 이마고(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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