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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을 '카멜레온'에 비유한 <조선일보>의 11월 9일자 기사.
이미지는 실체의 외피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순진한 바보다. 한국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를 허다하게 목격한다. 이미지와 실체가 따로 놀고, 이미지가 실체를 압박하는 경우다. 정치영역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의 사례가 있다.

<조선일보>는 오늘자에서 권오승 위원장을 '카멜레온'에 비유했다. 취임 초엔 "재벌 규제 없다"고 하다가 8개월 만에 초강력 재벌규제책을 들고 나온 걸 문제 삼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카멜레온 권오승'을 묘사, 또는 설명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평가를 내세웠다. 이런 것들이다.

"보통 혼자서 구상한 후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성격."
"고지식한 측면이 없지 않다."
"기업 현실을 모르고 이상주의적인 원칙을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벽에 대고 얘기를 하는 것 같다."


평가에 나선 사람들은 권오승 위원장의 제자, 재계나 다른 정부부처 관계자, 야당 의원 등이다.

궁금해진다. 권오승 위원장에 대한 이런 묘사는 '카멜레온'보다는 '곰'에 가깝다. <조선일보>도 기사의 다른 구절에서 그를 '독불장군'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왜 <조선일보>는 권오승 위원장을 '카멜레온'이라고 했을까?

<조선일보>는 "출총제 대안 태스크포스팀 논의가 시작되면서 재벌 규제정책에 대한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색깔을 '바꿨다'가 아니라 '드러냈다'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권오승 위원장은 애초부터 재벌 규제 입장을 고집했으나 취임 초에만 잠깐 "재벌 규제 없다"고 연막을 쳤다는 얘기다. 다른 구절에서 권오승 위원장이 교수 시절 "부정적인 재벌관을 종종 드러냈었다"고 전한 걸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꿈보다 해몽'에 가깝다. <조선일보>는 기사 곳곳에서 권오승 위원장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재벌정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이 달라진 것인지, 청와대가 원격조종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급격히 변하고 있다"고 했다. 애초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다.

헷갈린다. <조선일보> 기사만 갖고는 권오승 위원장의 입장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숨겼던'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접자. 헷갈리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조선일보>가 중시하는 건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다는 점이다. '카멜레온' 행태는 분명하다고 한다.

<중앙일보>가 묘사한 권오승 위원장의 모습은 '좌파'다.

"삼성, 현대차, SK그룹 등은 소유는 개인에게 있지만 국민의 기업"이라는 그의 주장, "대기업 집단은 공적 성격이 있다"는 그의 주장을 전한 다음에 이런 평가를 맞세웠다. "사유재산권 원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시장경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러니까 권오승 위원장은 사유재산권을 부인한 사람이다.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좌파의 사고에 빠져있다는 얘기로도 연결된다.

<중앙일보>가 권오승 위원장을 이렇게 바라보니 "대기업 집단은 성공하면 총수의 것이고, 실패하면 국가가 공적자금을 댄다"는 그의 경험담은 그리 중요하게 평가할 게 못 된다.

이제 조합을 시도하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이미지 묘사는 어떤 결과를 부를까?

공정거래위원회는 어제(8일) 출자총액제한제 대안을 제시했다. 출자총액제한제 적용대상을 자산 6조원 이상의 재벌의 계열사 중 자산 2조원 이상의 '중핵기업'으로 완화하되 환상형 순환출자 금지제도를 도입하는 안이다.

<조선> <중앙>의 '권오승 때리기' 배경은?

▲ 권오승 위원장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는 <중앙일보> 11월 9일자.

두 신문의 '권오승 때리기'는 이 방안이 나온 직후 이뤄졌다. 배경이 어림 잡힌다. 적장을 베는 것, 이것보다 전쟁에서 더 쉽게 이기는 방법은 없다.

안전장치도 갖춰놨다. '카멜레온의 고집'과 '좌파의 술수'라는 이미지 외에 하나 덧붙인 게 있다. 청와대다. <조선일보>는 '청와대의 원격조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고, <중앙일보>는 권오승 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 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고, 사위의 스승이었던 사실을 별도 항목으로 뽑아 전했다.

이렇게 되면 권오승 위원장이 주도한 공정거래위의 재벌규제책은 '코드 정책'의 산물이 된다. '좌파 청와대'에 납품하는 'OEM정책' 말이다.

눈 여겨 볼 대목이 하나 있다. 두 신문은 권오승 위원장의 이미지를 색칠하는 과정에서 재벌규제책과는 거리가 있는 요소를 끼워 넣었다. 언론문제다.

<중앙일보>는 권오승 위원장이 "신문시장 규제 때문에 공정위가 언론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을 못 받는 것 같다"며 언론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는 권오승 위원장이 "취임 후 6개월도 안 돼 정부기관 및 시민단체와 함께 '신문 경품 및 공짜 신문 안주기 안받기 캠페인'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2일 "광고 때문에 기사나 사설이 사실과 다르게 나온다"는 권오승 위원장의 국회 발언을 크게 문제 삼는 기사를 실은 바도 있다.

두 신문이 권오승 위원장의 "비뚤어진 언론관"을 덤으로 문제 삼으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한 가지 사실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갈음하자. <조선일보>는 권오승 위원장이 내정된 직후(3월 17일) 사설을 통해 '특별 당부'했다. 권오승 위원장 체제의 공정거래위가 '불공정위원회'의 오명을 벗기 위해선 '소비자를 위한 공정위'로 거듭 나야 한다며 '특별한' 불공정 사례를 적시했다. '비판 신문', 그리고 그 배달지국에 대해 벌이는 '사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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