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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교육연수원사>에 실린 자신의 회고문을 보여주고 있는 곽용씨.
<울산교육연수원사>에 실린 자신의 회고문을 보여주고 있는 곽용씨. ⓒ 박석철
울산 동구 대왕암공원내에 있는 교육연수원 부지에 추진되고 있는'정주영박물관' 건립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16년전 연수원 관리담당을 맡았던 곽용씨가 당시에도 불거졌던 연수원 부지 매각설 등에 대한 비화를 공개했다.

곽용씨는 1990년부터 3년간 교육연수원에서 관리를 담당한 것을 포함해 35년간 교육공무원으로 재직했고, 지난 2003년 울산강북교육청 평생교육체육과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곽용씨가 이곳에 온 1990년은 당시 연수원부지에 있던 방어진중학교가 인근으로 옮기던 해였다.

곽용씨는 "당시에도 재벌이 연수원을 매입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내가 경남교육감(울산이 광역시가 되기 전이라 울산교육청은 경남도교육청 산하에 있었다)에게 연수원을 팔면 안 된다고 강력히 건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매각설이 있자 연수원 기증자인 고 이종산 선생의 자녀들이 화가 나 부지 내에 있던 고인의 공적비를 옮기려 했고 내가 간곡하게 부탁해서 겨우 말렸다"며 "연수원이 매각되면 전 재산을 털어 교육에 기증한 고인이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90년 정몽준 국회의원이 비서관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둘러보고 갔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오마이뉴스>에 'MJ계 구청장 '정주영박물관' 추진에 교육계 반발' 기사가 나간 후 곽용씨는 인터뷰를 요청했고 8일 그와 만났다. 그는 울산교육연수원의 역사를 담은 <울산교육연수원사(1970~2003)에 실린 당시의 회고사도 공개했다. 다음은 곽용씨와의 일문일답.

"연수원부지를 탐내나? 그냥 놔두라"

주민들이 고인의 뜻을 기려 마련한 공적비. 빨간글로  '고 리공종산 공적비'라 적혀 있다.
주민들이 고인의 뜻을 기려 마련한 공적비. 빨간글로 '고 리공종산 공적비'라 적혀 있다. ⓒ 박석철
- 울산교육연수원에는 언제 근무했나?
"1990년 3월 5일자로 발령 받았는데, 그 해 5월 방어진중학교가 학생 통학문제 등으로 인근으로 옮기고 노후된 건물을 증축했다. 당시 서무과장으로 관리를 담당했다."

- 당시에도 매각설이 있었나?
"학교가 이전하자 당시 울산시와 경남도교육청 등으로부터 '부지를 처분해야 한다' '재벌이 매입해서 개발한다' 등의 말이 파다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당시 학교장은 전교생이 모인 조례 때 '재벌이 이곳을 매입하려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 연수원은 어떤 곳이었나?
"울산 팔경 중 으뜸이고 뒤로는 백년 노송이 병풍처럼, 앞으로는 동해의 해가 떠 오르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느꼈다. 학생이든 교사든 이 곳에서 교육을 해야 훌륭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매각설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나?
"당시 울산시교육장(고인)은 어느 정도 매각에 찬성의 뜻을 가지고 계셔 나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해 8월 박정석 경남도 교육감과 울산교육장이 오셨길래 '얼마나 경관이 좋습니까, 절경이 좋아 재벌이 탐내고 있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부지를 팔지 마시고 앞으로 광역시가 되면 활용할 학생교육원을 지어달라'고 건의했었다.

그 때 경남교육감은 '항만청 땅이 포함돼 골치 아파 처분해야 한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했고 울산교육장은 '울산시에 협조해야 하며 교육청도 신설학교부지에 협조받은 것이 있어 처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 지역 교육장의 의지가 있었는 데도 반대했나?
"경남도 교육감에게 강력히 건의했다. 울산이 광역시가 되면 이런 부지를 구하기 어려우니 어떤 일이 있어도 팔지 말고 교육감님의 작품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뒤 교육감이 결심해 부지를 팔지 않고 3년간 보수해 울산교육연수원으로 존속하게 됐다."

울산 동구 대왕암공원 입구에서 본 전경. 일산해수욕장과 현대중공업 대형 크레인이 보인다.
울산 동구 대왕암공원 입구에서 본 전경. 일산해수욕장과 현대중공업 대형 크레인이 보인다. ⓒ 박석철
- 당시 유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90년 5월 학교가 떠나고 6월 어느날 인부들이 고 이종산 선생의 공적비를 파내고 있었다. 작업을 중지시키고 고인의 아드님을 찾아가 여기에 계속 보존하자고 했다.

그때 아드님은 '아버지가 전 재산을 들여 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기부했는데 팔면 되느냐? 교육 사업으로 자식들이 어렵게 사는 데 팔아 먹으라고 기부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교육재산으로 영원히 남기를 원했고 죽어서도 이곳을 지켜보고 계신다. 교육가치가 없어 팔겠다면 되돌려 달라'고 했다." (고인은 해방 후인 1947년 학교부지와 당시 현금 200만원를 들여 수산중학교를 세웠고 이후 교육청에 기부했다)

- 학교가 옮겨가고 어떤 일들이 있었나?
"당시 정몽준 국회의원이 비서관들을 데리고 와 '부지 주위에 쳐진 울타리를 없애 달라는 민원이 있어 왔다'며 이 곳을 죽 둘러봤다. 당시 학교가 이전한 후 불량배들이 건물 유리창을 모두 박살내는 등 행패가 심해 '울타리를 더 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곽용씨는 "당시 학교가 옮기면서 화단의 나무 한포기까지 남기지 않고 다 뽑아갔고 건물이 흉물로 변했다"며 "이후 건물 보수 공사와 부대시설 보수를 했고 특히 입구 도로 포장공사를 하고 꽃을 심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나 뿐 아니라 많은 교육계 사람들이 연수원부지는 후학 양성을 위한 교육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왜 동구청이 29만평의 대왕암공원이나 인근의 넓은 부지를 놔두고 연수원부지를 탐내나? 그냥 놔두라"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박석철 기자는 시사울산 발행인이며 이 기사는 sisaulsan.com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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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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