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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부르크에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라는 긴 정식 명칭을 갖고 있는 이 도시는 건물이며, 길이며 모든 것이 중세적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로텐부르크 내 모든 건물들은 어릴 때 갖고 놀던 장난감같이 생겼고, 길거리에는 마차가 관광객들을 실어나른다. 물론 로텐부르크 시내에도 자동차가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중세적 이미지를 갖춘 도시에 이런 현대의 발명품들은 너무나도 이상해보인다. 이렇게 '현대'의 모습이 오히려 이상스러울 정도로 로텐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는 도시의 천년 전 모습을 아무런 상처없이 간직해 왔다.

▲ 로텐부르크 시내의 모습
ⓒ 한대일

로텐부르크에는 시청사, 장난감 박물관, 성 야곱 교회, 중세 범죄 박물관 등 다양한 시각적 볼거리 뿐만 아니라 슈니발(Schneebal) 이라는 독특한 과자로도 유명한 곳이다. 슈니발을 먹으면서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걷노라면 잠시나마 21세기 생활을 잊을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

▲ 로텐부르크의 명물 슈니발 과자. 의외로 양이 많다.
ⓒ 한대일

이런 로텐부르크 중심가에 '마이스터트룽크(Meistertrunk) 시계'라는 것이 있다. 로텐부르크 시청 바로 옆에 있고, 시의 중심가에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마이스터트룽크 시계의 볼거리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매시 정각에 양쪽 창문에서 인형이 나와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인형의 움직임이 너무 적어서 기대를 품고 왔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실망하기 십상이다.

마이스터트룽크 시계는 분명 유명세에 비해 별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시계에 얽힌 일화와, 그리고 이 시계에 대한 로텐부르크 시민들의 애정을 고려하면 과연 마이스터트룽크 시계를 '시시하다'면서 매몰차게 돌아버릴 수 있을까.

▲ 로텐부르크의 중심가에 있는 마이스터트룽크 시계
ⓒ 한대일

일단 '마이스터트룽크(Meistertrunk)'의 뜻을 되짚어보자. '마이스터트룽크'는 독일어로 '위대한 들이킴'이란 뜻이다. 한마디로 '위대한 술 마시기'였다는 뜻인데, 술 마시는 것이 술 마시는 것이지 뭣하러 거기에 '위대한'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들어갔을까.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 시계의 인형들을 보기 위해 시청사 창문을 통해 바라본 모습
ⓒ 한대일

17세기의 유럽은 30년 전쟁으로 대지 곳곳이 신음하고 있었다. 특히 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독일은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고, 다수의 인명이 살상되는 비극을 겪고 있었다. 이런 약탈과 파괴는 주로 신성로마제국 군, 즉 구교도 군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그 원인은 구교도 군의 지휘관이었던 발렌슈타인과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간의 알력에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비록 황제 밑에 들어가 구교도 군을 지휘했지만 그는 황제 못지 않은 야심을 품고 있었으며, 황제와 잦은 의견 충돌을 보였다.

결국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이 신교파인 덴마크 군을 무찌른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쫓고 틸리를 사령관 자리에 앉히기에 이른다. (사실 맨 처음 지휘관은 틸리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발렌슈타인은 군량 조달 방해 등 온갖 방법으로 틸리가 지휘하는 구교도 군을 괴롭혔다.

이런 발렌슈타인의 공작으로 인해 굶주림에 빠져있던 틸리의 구교도 군은 결국 가는 도시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1631년에 신교도의 도시인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했는데, 구교도 군의 약탈과 파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사령관인 틸리조차도 탄식했다고 하며, 이 비극으로 인해 그동안 전쟁을 수수방관하던 수많은 신교도들이 연합하게 되었다. (이 연합에 구스타브 2세가 이끄는 스웨덴도 참가했는데, 스웨덴 군과의 전투에서 틸리가 목숨을 잃게 되니 사실상 마그데부르크의 약탈은 그의 목숨을 재촉시킨 결과를 낳았다.)

▲ 12시가 되자 창문이 열렸지만 인형의 모습을 잘 볼 수 없었다.
ⓒ 한대일

어쨌든 이런 잔인함으로 인해 신교 도시들은 구교도 군이 언제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파괴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신교 도시였던 로텐부르크의 시민들도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신은 그들을 외면하였는지 결국 구교도 군은 로텐부르크를 공격, 점령해버렸다.

안그래도 약탈에 굶주려있는 구교도 군인데 거기다 종교까지 다르니 그쪽 관점에서 보면 이교도들인 로텐부르크 시민들의 목숨은 이미 결정난 것처럼 보였다. 틸리도 굶주림에 처해 있는 자기 군사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고 거기다가 로텐부르크는 이교도들의 도시였으니 봐줄 필요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령자'를 위한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틸리도 계속된 전쟁으로 피곤했던지라 시민들이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한다.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어갔고, 술에 취해서 긴장이 풀린 틸리는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당시 로텐부르크 시장이었던 누쉬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3.25리터짜리 잔에 담긴 포도주를 단숨에 마시면 이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소."

누쉬는 술을 아예 못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잘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도시를 지키겠다는 마음에 익숙하지 않은 술을, 그것도 3.25리터를 '원샷'했고 결국 틸리의 군대로부터 로텐부르크를 지켜낸다. (반면 누쉬는 '원샷'의 여파로 3일 동안 한번도 일어나지 못한 채 잠만 잤다고 한다.)

▲ 마이스터트룽크 시계. 왼쪽이 틸리고 오른쪽이 시장 누쉬이다.
ⓒ 한대일

이런 누쉬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로텐부르크는 30년 전쟁의 포화를 피한 채 옛날 모습 그대로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다. 로텐부르크 시민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5월에는 마이스터트룽크 역사축제를, 9월 둘째 주말에는 제국자유도시 축제를 열며, 당시의 포도주 잔은 현재 제국도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누쉬는 술을 잘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시민을 지키기 위해 그런 '무모한' 행위를 했다. 자기 보신만을 추구했더라면 일부 시의원들과 함께 도시를 밤중에 몰래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설사 도시에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도시나 신교도 시민들은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만 구교, 즉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살길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유지한 채 시민들 곁에 있었고, 결국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 마이스터트룽크 시계. 앞의 임시 행사장 때문에 잘 볼 수 없었다.
ⓒ 한대일

하지만 과거 한국은 어떤가. 몽골의 침입 때 고려 조정과 최씨 무신정권은 개경과 육지 백성들은 내버려둔 채 자기들만 안전한 강화도로 피난을 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한양 백성들 몰래 평양으로 갔으며,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전 대통령 및 정부 수뇌진들은 거짓 방송으로 서울 시민들을 안심시킨 채 자기들만 혼자 대전행 기차를 탔다.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어느 누구도 국난 시절 때 로텐부르크 시장 누쉬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통치자는 없었다. (물론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직접 전장터에 나가며 백성들과 동거동락했지만 그는 세자였을 뿐 통치자 자리, 즉 임금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통치자란 달콤한 혀로 백성들의 마음을 홀리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울 때 자기 혼자 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백성들과 함께 국난의 길을 헤쳐나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통치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의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국난 상황에서 늘 통치자로부터 '배신'을 당해왔다.

이렇게 통치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민중들은 침략자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해왔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백성들의 사정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통치자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봤을 때 한명도 없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우리가 마이스터트룽크 시계와 로텐부르크라는 도시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입실론 (Epsilon)'이란 필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싸이월드에 '입실론의 C.A & so on Travel 가이드페이퍼'를 발행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필자의 게으름으로 인해 아직 로텐부르크에 대한 페이퍼는 발행하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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