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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군으로 진급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할아버지의 근엄하신 모습이 떠올랐다. 완도에 버스 한 대도 없던 그 시절에 할아버지께서는 “언젠가는 우리 명렬이가 큰 사람이 되어 차를 타고 오게 될 것이다. 대문 길을 좁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나에 대한 기대가 각별하셨다. 별판을 붙인 지프차를 타고 맨 먼저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인사드렸다.
흔들거리는 차 안에서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내가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 의의와 의미를 정리했다.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비롯해 방방곡곡에 묻혀 계신 의병 할아버님들과 항일 독립 전장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신 수많은 독립군 광복군 선조님들께서 “민족적 자존심 없는 군대는 죽은 군대다. 민족의 정기가 바로 선 자랑스러운 민족의 군대를 만들라!”고 나에게 별을 달아주신 것이라 결론했다.
난 취임 복무계획서 작성부터 이런 꿈을 이루는 데 목표를 정하고 모든 사업 계획을 여기에 집중했다. “조직이 일을 한다. 무형의 심리 전력을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참모조직을 만들어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민족의 군대, 인간을 귀히 여기는 민주군대로 군을 개혁하리라”는 생각으로 2군에서 이미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가 육본에서 좌절된 참모부 설치안(案)을 다시 들고 나섰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들 했다. 특히 육본의 동기생 장군들은 걱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표 장군! 너는 어째 꼭 불가능한 일에만 도전하느냐? 네가 순진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너무 모른다”는 핀잔이었다.
“표 장군! 참모부장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군단장 나가서 별 하나 더 다는 거야. 지금의 참모부장끼리 경쟁만으로도 피곤한데 참모부를 하나 더 만들겠다고 하니 어느 부장이 오케이 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니 제발 덮어두는 것이 좋을 거라 조언해주었다. 그러나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난 시간 나는 대로 참모부장들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다니며 설명을 했다. 필요성과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작 이 안을 가지고 나서야 할 작전참모부 관계관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이 있다. 기회는 끊임없이 찾아오고 얼마든지 발견된다. 참으로 기적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86년 11월 전방 DMZ 지역에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것 같다는 여러 증후의 첩보 보고가 올라왔다. 그런데 이 내용이 ‘김일성 사망’ 정보로 언론에 흘려져 <조선일보> 등에 대서특필 요란했다. 사실무근임이 밝혀짐에 따라 군이 큰 망신을 당했다.
이는 바로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국가심리전 체계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여실히 설명해 주는 사건이었다.
미군에게는 우리의 비무장 지대가 한갓 군사적 의미밖에 없겠지만, 우리의 입장은 다르다. 지금처럼 남북 왕래가 없었던 당시에는 동족인 적과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는 유일한 이 지대는 국가 심리전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전방 사단의 전초기지 정도로만 취급되어 현지 지휘관에게만 운영이 맡겨져 있을 뿐 국방부나 육군 수준에서는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고 있었다.
육본에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대책을 강구한다고 법석이었다. 나는 “바로 이 때다”하고 참모 차장에게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 보고를 했다.
“지금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심리전은 휴전이 없습니다. 지금도 전방에서는 치열하게 심리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한 전문적 대책이 없습니다. 조직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모총장님은 아침마다 일반 참모부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계시는데 현재 작전중인 심리전에 대해서는 아무도 보고해주지 않습니다. 정보참모부의 임무라고 하지만 심리전 정보 업무의 수준을 넘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작전 상황임에도 총장님께서는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과 같은 실수는 필연적입니다. 통일을 이룩할 때까지는 우리 군의 참모체제를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 운영하여야 합니다. 무기체계와 관련된 군사교리와 참모체제와는 전혀 상치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심리전 업무만 통합하여 일반참모부로 만들면 됩니다.
말로만 독자적 교리 발전이라고 하면 뭐합니까? 심리 전력이야말로 우리가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분야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책임 수행하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참모차장 박명철 장군은 육군본부 부서장 가운데 유일한 비육사 출신 장군으로서 본인의 진출보다는 군 발전을 위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노력하는 분이었다. 나의 설명을 다 듣더니 너무나 놀란 표정이었다.
“표 장군, 나도 그간 군의 발전을 위해서 여러 가지 연구도 많이 해왔는데, 왜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는지하는 생각이 드오! 지금까지 나에게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소”라 하며 나의 착안과 집념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모차장께서 총장에게 보고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정성을 쏟아 만든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비장한 목소리로 총장에게 한마디 했다.
“총장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거쳐 갔습니다. 그 분들이 이 자리에서 우리 군의 발전을 위해 무슨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군의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국군의 역사에 길이길이 지워지지 않을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총장님 앞에 그 기회가 놓여 있습니다. 한국군의 독자적 참모체제와 이에 따른 교리 그리고 제도를 한국 실정에 부합되게 새롭게 건립하신 참모총장님으로 길이 남게 되실 겁니다.”
참모총장도 상당히 긴장된 자세로 나의 설명을 경청하였다. 드디어 “좋아! 정책회의에 회부해봐”라고 하였다.
참모부장들은 육군의 이런 중요한 정책이 정훈감에 의해서 제안되고 논의되다니, 자존심에 관계되는 문제라는 눈치였다. 주무 부서인 작전참모부와 정보참모부의 반발이 가장 심했다. 여러 번의 정책회의가 있었다. 정책회의 의장인 참모차장의 확고한 입장 그리고, 나의 끈질긴 설득과 신념 어린 호소 끝에 드디어 육본에 민사심리전 참모부를 설치하는 정책이 통과되었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내 군 생활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룩한 이 사업의 후속 조치를 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선 새로 구성된 참모부 운영의 지침과 절차를 규정하는 참모 업무교리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다. 모든 부대훈련과 지휘소 연습 그리고 군학교기관의 교육에서 운영하고 훈련할 수 있는 민사심리전 참모계획, 참모판단, 참모회의, 참모보고 등에 관한 교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참모부가 창설되고 오래지 않아 나는 예편되었다. 초대 참모부장을 역임한 천용택 장군과 제2대 참모부장 편장원 장군은 모두 군단장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참모부 조직이 정착될 수 있는 기본 틀을 갖추는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모업무 교리와 참모요원에 대한 인사관리 등의 제도가 뒤따르지 않았다.
창설 때부터 부정적이었던 다른 참모부장들은 끊임없이 해체를 주장, 기회만 노려왔고 특히 정훈병과에서는 일반참모부에서 유능한 간부들이 유입됨으로서 자신들의 진출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병과 이기주의에 집착하여 분리되기를 완강히 주장했다. 심지어 내가 별을 하나 더 붙이기 위해 만든 안이라는 둥 병과를 팔아먹은 자라며 악평을 퍼뜨렸다. 결국 참모부는 2대 참모부장 이후 없어지고 말았다.
정신전력이라는 무형전력을 심리 전력으로 개념화하여 한국군 독자적 심리전 체계를 건설하고자 했던 나의 꿈은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한때 국회에 진출하여 국방 분과 위원 자격으로 대안을 제시한 후 국정감사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으로 뜻을 관철하려고 노력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군대개혁에 대해 외치고 주장하는 동안 어느새 세월만 흘러가버려 이렇게 백발이 성성해졌다. 내 평생의 소원이 한(恨)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많다.
아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를 나는 믿는다. 나보다 훨씬 나은 후배들에 의해 더 잘해 나갈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