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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3주차를 맞았다는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의 "인권문제 중 차별문제를 다뤘고, 인권을 일상적인 문제로 취급하고자 했습니다. 인권과 호흡하라는 뜻입니다"라는 인사말과 함께 시작한 옴니버스영화 <세 번째 시선>을 보고 나오면서 자꾸만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인권'이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인권위원장의 말처럼 영화는 우리의 일상사를 통해 미등록이주노동자, 소녀가장, 인종차별, 가사 분담과 관련한 성 차별, 학생들의 왕따,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들을 가슴 아리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하필 왜 어머니가 떠올랐을까요?
칠순을 바라보시는 저희 어머님은 젊어서 해녀이셨습니다. 온 종일 바다에서 물질을 하시고 집에 돌아오시던 어머니. 자식들이 밥이라도 해 놓으면 좋으련만, 놀기에 바빴던 아이들은 그런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면, "이놈의 새끼들, 어멍이 앞바당에 강 확 죽어사 속시원허크냐? 보리쏠이라도 솖아놓쥬마는..."(엄마가 앞바다에 가서 확 죽어야 속시원하겠니? 보리쌀이라도 삶아놓던지...)하시며 호기 좋게 호통을 치시곤 하셨습니다.
사실 평생을 물질하며, 물살이 험한 보에서 떠내려가던 육지 사람들을 여러 번 살려낸 분이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 이치상 맞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호통을 치실 때면 팔팔한 어린 자식들 기는 팍 죽었습니다.
나이가 드시며 기개 좋던 목소리가 잦아들 때쯤, 어머니는 자식들의 결혼 원칙에 대해 종종 훈계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라는 것이 단순명료하고 간단했습니다.
"결혼? 육지 여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간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주의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말에는 섬사람들의 뭍사람에 대한 경계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또한 평생 물질을 하시며 사셨던 분들의 처지에서는 '물질을 못한다'는 것은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즉 결혼에 있어 육지 여잔 안 된다는 말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뭍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경계와 생활력이 딸리는 여자를 데리고 와선 안 된다는 의미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이 전부가 아니었던 나이에도 그 요구는 부당하게 여겨졌습니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사회생활을 육지에서 할 수도 있을 사람에게 "육지 여잔 절대 안 된다"고 할 때마다, "왜 육지 여잔 안 돼요?"라고 되물었고, 대답은 "이 놈의 새끼, 벌써부터"가 전부였습니다.
그렇기에 대학 1학기를 마치고, 방학에 고향을 찾았을 때도, 어머니의 첫 질문은, "육지 여자 사궘시냐?(사귀니?)"하시며, '육지 여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지 여자 반대하던 어머니... 자식 잘 되라는 마음
그런 분이셨기에 군제대후 해외에 일 년 정도 갔다 온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외국 여잔 안 돼!"라고 하시며 자식을 훈계하셨습니다. 그때 역시 저는 "왜 외국 여잔 안 돼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외국 며느리 데려 오면, 시어멍이 불러도 '헬로우' 허멍 눈망 멀뚱멀뚱 뜨면 어떵허느니?"(시어머니가 불러도 '헬로우' 하면서 눈만 멀뚱멀뚱 뜨면 어떡하겠니?)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육지 여자, 외국 여자는 절대 안 된다면서 자식의 결혼 원칙에 대해 분명하셨던 분이셨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요? 대학을 졸업하고 막내아들이 결혼하겠다고 육지여자를 데려왔을 때는 단 한마디도 싫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시고 결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품 떠난 자식의 삶의 테두리를 인정하신 것이었는지, 며느리가 한눈에 맘에 들었는지 모르지만, 말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른 이방 여인을 집안에 들이는 것에 대해 부모의 처지에서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훈계를 하고 가르쳤던 어머니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던 저였기에, <세 번째 시선>에서, <험난한 인생>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습니다. 영화는 엄마와 아들의 이성 친구에 대한 견해 차이를 통해 인종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영화에 나온 주인공 엄마는 자식의 친구들에게 은근히 자식의 여자 친구를 자랑할 생각이었습니다. 엄마가 알기로 자식의 여자 친구가 영어 학원 백인 원장 선생님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아들이 데리고 온 친구는 곱슬머리를 길게 땋은 흑인 아이였습니다. 엄마는 자식이 데려 온 여자 아이에게 '하이(Hi)'라고 인사를 건네는데, 저절로 한숨이 길게 배어 나와 객석은 웃음바다가 되고 맙니다.
엄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지 인터넷 검색을 해 봅니다. 과연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흑인이 태어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합니다.
주인공 남자 아이의 엄마는 숫기가 없어 입도 뻥긋 못하는 자식의 영어 공부에 목을 맵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삶의 테두리는 매우 전통적입니다. 집에서는 한복을 입고, 벽에는 난초를 그린 액자와 태극문양, 전통 자수가 걸려 있고, 장롱도 고풍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영화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엄마와 손바닥을 뒤집는 '흑백놀이'로 친구의 이성 친구를 놀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정서를 꼬집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작 인종차별적 정서를 꼬집는 인권적인 측면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던 주인공 엄마의 심정이 더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육지 여자'와 결혼했고, 하는 일 역시 '이주노동자' 관련한 비영리단체 일이니 부모의 처지에서 자식이 탐탁했겠습니까?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정작 결혼을 앞두고는 출신지역이나 피부색이 다르더라도 '행복하게 둘이 잘 살면 그만이지'라고 축복해 주시며, 당신의 굳은 뜻을 접어 주셨습니다.
세상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함께 껴안을 수 있을 때, '험난한 인생'도 살만하다는 것을 어머니는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국가인권위 인권영화 <세 번째 시선>을 보게 된 건, '잠수왕 무하마드'의 정윤철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정윤철 감독과의 인터뷰 기사는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