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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에 걸었습니다
난간에 걸었습니다 ⓒ 김관숙
선선한 가을바람에 채소들이 아주 잘 말랐습니다. 호박 가지 무말랭이 고춧잎 그리고 느타리버섯까지 생각보다 때깔도 잘 나왔습니다. 그 모두를 모아 놓고 보니까 오붓하고 흐뭇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남편 역시 흐뭇한 모양입니다.

“거 참 이쁘게 말랐는 걸. 근데 도라지는 안 말렸나봐?”
“도라지 말린 건 아래층 어르신이 좀 준다구 말리지 말라구 했어. 시골에서 많이 올 거래.”

“또? 거 번번이 얻어먹네.”
“그래서 느타리버섯 말린 거 좀 드릴 생각이야.”

예전에 어르신들은 가을만 되면 마른 나물들을 몇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가 넘게 골고루 아주 정월 보름에 먹을 것까지 넉넉하게 만들어 두고는 했습니다. 찬바람이 씽씽 거리고 눈 쏟아지는 겨울이 오면 비타민을 보충하는 음식으로 마른 나물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른 나물 만들어 두기’ 는 옛말이 되다시피했습니다. 일년 내내 푸른 채소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시래기나물은 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라서 김장철만 되면 무청들을 버리는 집이 없습니다. 그 외에 마른 나물들 역시 전혀 안 먹고 살지는 않습니다. 음력 정월 보름 같은 때 마트나 시장에 가 보면 물에 잔뜩 불려서 파는 갖가지 마른 나물들이 동이 나고는 합니다.

마른 나물을 물에 적당히 불려 삶아서 살짝 물에 우렸다가 갖은 양념에 조선간장 간을 싱겁게 해서 참기름이나 들기름에 볶아낸 그 맛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이면 가족들이 좋아하는 채소 몇 가지를 깔끔하게 말려서 두고는 먹고 싶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 나물을 만들어 먹습니다.

무말랭이와 느타리버섯입니다
무말랭이와 느타리버섯입니다 ⓒ 김관숙
내가 사는 아파트는 남향인데다 꼭대기층이라서 가을부터 겨울 내내 눈이 부실 정도로 햇볕이 온종일 들어와 있습니다. 나는 베란다 난간과 햇볕이 온종일 들어오는 것을 이용해서 해마다 채소들을 말리고는 합니다. 채소 말리는 방법은 아래층 어르신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인가 한번은 어르신 집에 놀러갔더니 그 집 베란다 난간에 실에 꿰어진 무말랭이들이 하얗게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닷새면 뽀송하게 마른다고 했습니다. 꼭대기 층 난간이라 햇볕도 오래 머물고 바람도 좋고 재미도 나고 값도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고 했습니다. 옆에서 젊은 며느리가 미관상 어쩌구 하면서 배시시 웃었습니다. 그러자 어르신이 타이르듯이 말했습니다.

“꼭대기 층 누가 보냐? 땅에선 보이지두 않아. 그리구 이런 건 얼마든지 괜찮아.”

그 방법을 몰랐을 때는 김장 때 나오는 무청으로 시래기만을 만들었고 다른 마른 나물들은 먹고 싶을 때 사다가 해 먹었습니다. 조금 궁상스럽기는 해도 어르신네와 같은 방법대로 해보니까 정말 재미나게 뽀송뽀송 아주 잘 말랐습니다. 그 이후 나는 가을이면 무말랭이와 가지는 난간을 이용해 말리고는 합니다.

호박도 말렸습니다
호박도 말렸습니다 ⓒ 김관숙

고춧잎과 무말랭이 입니다.
고춧잎과 무말랭이 입니다. ⓒ 김관숙

느타리버섯과 가지 입니다
느타리버섯과 가지 입니다 ⓒ 김관숙
그래도 나는 가지 애호박 무 느타리버섯 등을 종류별로 가지런하게 썰고 대바늘로 실에 줄줄이사탕처럼 꿰어 난간에 걸거나 햇볕 따라 빨래건조대 위에 널기도 하고, 또 널어 논 것을 가끔 가끔 뒤적여 주고 할 때마다 주택에 사는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친구의 말로는 무말랭이든 무슨 나물을 말리든 간에 마당에 놓인 평상에 널어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실에 꿰어 줄줄이사탕 모양을 만드는 수고를 하거나 또는 때때로 뒤적거려 주지 않아도 햇볕과 바람이 제 때깔이 나게 예쁘게 잘 말려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지를 모릅니다.

나는 친구 집 뜰에 수목들이며 여름이면 봉숭아 한련화 채송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밭도 부럽습니다. 상추 쑥갓 시금치들이 푸르게 자라나는 텃밭도 있습니다.

사는이야기에 기자님들이 올린 농촌 살이 이야기들을 읽을 적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풍경 속에 들어가 있고는 했습니다. 나이 든 내가 챙 넓은 모자를 깊숙이 쓰고는 땀을 뚝 뚝 흘려가며, 허리가 결려 가끔씩 밭둑에 나와 앉아 있기도 하면서 그래도 즐겁고 재미가 나기만 해서 어린 고추모를 심기도 하고 상추 잎을 따기도 하고 열무를 뽑아 김치를 맛있게 담그기도 하고 또 밭이 타들어 가는 가뭄을 걱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남편에게 우리도 텃밭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합니다. 남편이 가꾸는 화분들은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늘 푸릅니다. 내 짧은 상식으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텃밭 하나면 남편과 내 소일거리로는 일년 365일이 꽉 찰 듯했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여행도 틈틈이 다니면서 말입니다. 거기까지만 상상을 해도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사를 가는 데는 결심도 필요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해야 할 점들이 많았습니다. 대뜸 남편은 머리가 허연 이 나이에 YMCA에서 수영을 같이 하는 동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무청은 며칠 전에 이미 빨간 포장용 끈으로 엮어서 베란다 한 쪽에 매달았습니다. 짠지용 무단과 깍두기용 무단에서 나온 무청만으로 봄까지 먹을 시래기나물 거리는 충분합니다.

무청은 남편이 어린 시절 시골에 살던 솜씨를 발휘해 엮었습니다. 그런데 무청을 엮다가 무청이파리에 많이 난 벌레구멍들을 보고 베란다에 매달면 나방이가 생길 것 같다면서 삶아서 말리는 것이 어떠냐고 했습니다. 무청 이파리에 붙은 알들이 훈훈한 베란다 기온에 깨어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무청을 삶아 말리면 그건 시래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방이가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두고 지켜보자고 했는데 아직까지 꾸물거리는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커피를 타러 주방으로 가고 나는 마른 나물들을 저마다 비닐봉지에 담아 놓습니다. 무를 골패 모양으로 썰어서 하나씩 바늘로 실에 꿰어 베란다 난간에 걸쳐놓을 적만 해도 요렇게 깨끗한 말랭이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근래 날씨가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채소 말리기는 은근히 까다롭습니다. 무말랭이 같은 건 햇볕만 좋고 바람이 없으면 잘 마르지 않으면서 색이 꺼무스름하게 변합니다. 색이 변하면 영양가도 파괴되고 맙니다. 마른 나물은 채소일 때보다 비타민 D가 풍부하다고 하는데 그 역시 얻지를 못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하얀 햇볕이 내리 꽂히는 친구네 평상에 널어 논 무말랭이들은 저녁이면 습기를 먹어 축축해질까봐 거두어 들였다가 아침에 다시 내다가 널어놓고는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난간에 걸어 둔 내 무말랭이들은 밤에도 거두어들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는 했습니다. 귀찮기도 했지만 선선한 밤바람에도 마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침에 일어나 내다 보면 전날 저녁때보다 훨씬 많이 말라서 부피가 줄어져 있고는 했습니다. 은근히 재밌습니다.

남편이 주방에서 내 커피까지 타가지고 나왔습니다. 오늘따라 남편이 타 준 커피가 아주 맛있습니다.

“커피 먹구 갖다 드리지 그래, 저녁 다 돼 가는데.”
“그래야겠네, 그래야 저녁에 해서 잡수시지.”

아래층 어르신은 청국장을 좋아합니다. 청국장을 바특하게 끓일 때 말린 느타리버섯을 넣으면 맛이 그만입니다. 국물 맛도 쫄깃쫄깃 씹히는 맛도 그만입니다.

나는 커피를 다 마시자마자 어르신에게 드릴 말린 느타리버섯 비닐봉지를 들고 현관을 나섰습니다. 우리도 오늘 저녁에는 말린 느타리버섯 한 줌을 넣고 청국장을 바특하게 끓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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