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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과 뱀과 짭은 이야기>
ⓒ 랜덤하우스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장옥관 시인이 네 번째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를 상재했다. 세 번째 시집 <하늘 우물>을 펴낸 지 햇수로 3년 만의 일이다. 3년이라는 시간의 터울을 두고 세상에 나온 <하늘 우물>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의 빛깔과 향기는 현격하게 다르다.

앞의 시집들은 시어들의 선명한 빛깔과 조화로운 화음으로 짜인 섬세한 상상력의 공간을 보여준 것이라면,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는 활달하다 못해 폭발적인 상상력의 공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시적 대상에 조심스레 다가가 미세한 결을 노래하기보다는 대상의 본질에 단도직입으로 파고들어가 대상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같이 노래한다고나 할까.

경주 남산 달밤에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아닌 밤중에 웬 가오리라니

뒤틀리고 꼬여 자라는 것이 남산 소나무들이어서
그 나무들 무릎뼈 펴 둥싯, 만월이다

그럴 즈음 잡티 하나 없는 고요의 대낮이 되어서는 꽃, 새, 바위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당신은 고요히 자신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 귀 먹먹하고 숨 갑갑하다면 남산 일대가
바다로 바뀐 탓일 게다

항아리에 차오르는 달빛이 봉우리까지 담겨들면
산꼭대기에 납작 엎드려 있던 삼층 옥개석이 주욱, 지느러미 펼치면서 저런, 저런 소리치며 등짝 검은 가오리 솟구친다
무겁게 어둠 눌러 덮은 오랜 자국이 저 희디흰 배때기여서
그 빛은 참 아뜩한 기쁨이 아닐 수 없겠다

달밤에 천 마리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골짜기마다 코 떨어지고 목 사라진 돌부처
앉음새 고쳐 앉은 몸에
금강소나무 같은 굵은 팔뚝이 툭, 툭 불거진다


('가오리 날아오르다' 전문)

제15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에서는 장옥관의 활달한 상상력이 한껏 빛을 발하고 있다. 경주 남산과 만월이 장옥관 시인의 활달한 상상력을 만나 새롭게 살아 꿈틀대는 생명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둥싯, 만월이 떠오르듯 장옥관의 활달한 상상력으로 삼층 옥개석이 검은 가오리가 되어 지느러미를 펴며 하늘을 날아오르고, 경주 남산이 바다로 바뀌고, 코 떨어지고 목 잘려나간 돌부처의 몸에 생명의 핏줄이 툭툭 불거지고 있다.

장옥관 시인의 눈에 포착된 세상의 어떤 사물과 사건도 시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봄날 거리를 달려가는 어린 개의 항문이 복사꽃으로 하늘의 괄약근으로 변용되어 시가 되고('봄 외출'), 동네 어귀 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다가 옹벽으로 뛰어내리는 참새를 본 것이 시가 되고('봄날이었다'), 별안간(瞥眼間)이라는 어휘가 시가 되고('별안간'), 시인이 혼자 쓰는 작업실 페트병에 눈 오줌이 시가 되고('오줌꽃'), 일요일 낮에 트럭타고 온 계란장수의 마이크 소리가 시가 되고('날계란 한 판이 몽땅 깨지듯이'), 늦은 점심 먹고 골목에 내놓은 알루미늄 식반이 시가 되고('무슨 일이 있었던가'), 선배 시인의 시를 읽다가 그 선배의 삶이 시가 되고('홍어'), 쏴아아아 세찬 물살 소리, 은사시나무 우듬지에 지나는 살여울이 시가 되고('여울물은 하늘에서도 쏟아진다') 있다. 장옥관 시인의 눈에 붙들린 사물과 사건은 모두 시퍼렇게 시로 되살아난다.

장옥관의 시를 두고 문학평론가 김양헌은 "인식의 상투성을 깨부수고 대상의 본질을 찾아내어 깨달음에 이르는 구조", "종횡무진 날아오르고 솟구치는 동사들의 역동성은 시인의 깨달음을 명상의 산사에서 신명나는 난장으로 옮겨놓는다"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책머리에 "말과 말 사이에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장옥관의 시는 시인 자신의 삶과 몸에 피어나는 꽃이다. 이번 시집에는 유독 '꽃'이라는 시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시인의 삶에서, 몸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시 아니겠는가.

시인은 공기 도둑이라는 말도 있지만*
공기 한 줌을 거저 얻어서
온종일 넌출넌출 즐거움이 넝쿨로 뻗어간다
물이나 햇빛, 공기 따위를
런닝구 사 입듯 사고팔 수는 없겠지만
눈썹 펴고 건네는 인사조차 이웃간에 거저 얻기 힘든 터에
허구헌 날 지나다니면서도 몰랐던
동네 카센터
이야기 나누던 손님 기다리게 해놓고, 모터 돌리고 호스 연결 해 낡은 자전거 앞 타이어에 탱탱하게 바람 넣어주고, 시키지 않은 뒷바퀴까지 빵빵하게 공기 채워주는데
삯이 얼마냐 물었더니
옥수수 잇바디 씨익, 그냥 가시란다
햐, 공짜!
공으로 얻은 공기 채운 마음
공처럼 둥글어져서
푸들푸들 가로수가 강아지처럼 마냥 까부는데
페달 밟으니 바퀴 버팅기고 있던 살대가 모조리 지워지고 동그라미 두 개만 떠오른다
비눗방울처럼 안팎이 두루 한 겹 공기로 채워진
무게 없는 것들
발목 잡는 삶의 수고와 중력 벗어나 구름과 나와 자전거는 이미 한 형제가 되었으니
텅텅 속 비운 지구가
공기 품은 민들레 씨앗처럼 한껏
위로 위로
공중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공기 예찬' 전문) * 부분은 러시아 시인 만젤슈탐(O. Mandel' shtam)의 시구

나는 자전거 타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장옥관의 '공기 예찬'을 읽고서 이제부터라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해볼까 생각했다. 이 시를 읽는 시인 누구라도 '예찬'의 말씀을 보태지 않을 사람 없겠다. 삶의 한 순간에서 얻은 경험을 자질구레한 일상의 언어를 이러쿵저러쿵 버무려 넣어서 지구가 공중에 떠오르듯 의미를 피워 올리는 시인의 장인적인 솜씨가 눈부시다. 이전의 시적 대상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행보를 버리고 그냥 터벅터벅 대상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는 이 말씀과 저 말씀을 보태고, 이 생각 저 생각 펼쳐서 뚝딱뚝딱 말씀의 집 한 채 세상에 올려놓는다.

이처럼 나는 장옥관의 이번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에서 이전의 시집과는 다른 활달한 상상력의 진경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상상력이 펼쳐내는 풍경은 편안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좋았다. 이것은 그 진경을 짜 올리는 언어가 우리 일상적으로 접하는 자질구레한 세목(細目)의 그것이고,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선 시인의 웅숭깊은 직관의 깊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봄날이었다', '꽃 피는 소리', '맨드라미, 닭벼슬 붉디붉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다 나무의 어머니', '살구나무 꿈을 꾸다' 등의 빼어난 시편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물 흐르는 듯한 높은 리듬감도 이번 시집에서 그가 얻은 시적 성과물이다.

덧붙이는 글 | 1955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국문학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198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이 있으며,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합니다.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장옥관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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