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뭐라고 불러요?”
“독도!”
“독도? 베트남 이름이 독도?”
“아니, 저기~ 섬 독도.”
“섬 이름 독도? 그게 왜 이름이죠?”
“우리 회사, 부산, 인천, 대구 다 있어.”
“회사에서 왜 그렇게 불러요?”
“몰라요. 옛날부터 여기저기 이름... 똑같애.”
달리 묻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본명이 ‘응우엔 ** ***’인 내담자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는 것이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수월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지명을 따라 ‘** 댁’이니 ‘** 아저씨’하고 부르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일하고 있는 ‘응우엔’씨의 경우 회사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이름을 지명으로 부를 때, 정감 있게 존중하며 그 사람의 특성을 잘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단순 편의적인 발상으로 부르며 우습게 여기는 태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산업연수생이나 고용허가제로 들어오면, 통장을 만들고 건강보험 등을 가입하기 때문에 실제 이름을 소리대로 기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절차가 필요 없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임의대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보아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통상 방글라데시 같은 이슬람권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 우리가 쉽게 들어 왔던 ‘후세인, 무하마드’ 등의 이름으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흑인들의 경우 ‘깜시’로 불리는 것을 종종 보아 왔습니다. 한편 본인의 이름과 전혀 상관없이 업체 측에서 붙여준 이름이 굳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19명의 임금체불 문제로 평택지방 노동사무소에 진정했던 인도네시아인들의 경우 회사 대표가 갖고온 급여대장과 진정인들이 갖고 있는 여권의 이름이 구분이 되지 않아 체불사건 처리에 애를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모 자동차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다, 부품 단가를 낮추라는 요구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 임금체불이 발생했다던 회사 대표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사실은, 직원들의 이름을 편의상 사람이 바뀌어도 같은 자리라면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이란 것이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그대로 불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편의상 편히 부르기 위한 이름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이름이 사람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잠수왕 무하마드>에선 외국국적의 동료 노동자들을 지칭하며, 한국인 노동자가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도 모르는 깜시들만 불쌍하지.”
어떻게 보면 똑같은 일을 하며 같은 처지에 있는 입장으로, 동료인 이주노동자를 긍휼히 여기는 듯하지만, 그의 언어 속에는 인종적 우월감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의식 속의 차별적 언어습관인 것이지요.
고등학교 때 열심히 암송했던 시 중에 김춘수 시인의 ‘꽃’에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존중하며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기 전의 이주노동자는 그저 ‘노동력’이나 제공하는 인격적 존재가 아닌 ‘기계’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하나의 몸짓’이 아닌 ‘꽃’으로, ‘기계’가 아닌 ‘노동자’로 인식되려면, ‘응우엔’이 ‘응우엔’으로 불리어져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이름’ 혹은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인식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철학적인 명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
덧붙이는 글 |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응우엔씨는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입국하여 2년이 지나고 있는데, 일하는 시간에 비해 받는 급여가 최저임금에 따라 계산해도 매월 25만 원 이상 차이가 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근로계약 연장을 하지 않으면, 짐 싸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라고하며 연장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