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편지를 쓰게 된 건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를 읽고서였다. 굳이 츠지 히토나리라서 찾아 읽은 것도 아닌데, 어느새 작가의 소설들을 대부분 섭렵한 뒤라 이제는 친근한 맘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작가의 이력과 외모는 한국의 소설가 공지영씨와 공동집필한 <사랑한 후에 오는 것들>을 읽을 때 처음 확인했는데 소설가로, 음악가로, 영화감독으로 예술방면에서 활약이 대단한,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남자였다.
츠지 히토나리는 소설가로 막 입문했을 때 편지를 대필하는 일을 했단다. 나도 언젠가 생각해본 일이다. 언제나 모든 일의 승자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느냐, 아니냐에 좌우되는 것 같다. 한장 한장 썼던 편지를 엮어 굵직한 (또한 가치 있는) 한 편의 소설을 만들 수 있는 것을 보면 역시나 말이다.
그 시절, 작가는 친구 집을 빌려 살면서 막 내린 커피향이 향긋한 아래층의 카페에서 의뢰인들을 만나며 그들의 사연을 전해듣고, 저녁이면 석양이 편지지를 빨갛게 물들이는 창가의 책상 위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상상해보면 참으로 낭만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과거가 된 모든 현실은 기실 그 순간만큼은 고달픔이 함께 하니 지금의 내 현실도 언젠가 이리 낭만적일 수 있으리라 자위해보았다.
혹자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편지도 술술 잘 쓰리라 단정 지었다. 그러나 작가는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다양한 신분과 나이의 의뢰인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느라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츠지 히토나리는 편지란 참으로 신기해서 그것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종이 안에 고스란히 배어져 전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편지를 대필하기 위해선 작가 자신이 아닌, 의뢰인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첫사랑을 향한 고백편지를 의뢰한 소년, 25년 전 사랑한 여인에게 그 여인의 연인을 살해한 것에 대해 사죄편지를 의뢰한 남자, 멋대로 버린 남자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편지를 의뢰한 여자, 자신에게 무심한 자식과 아내에게 복수의 편지를 써달라 의뢰한 노인 등. 모두 제 각각의 내용이지만 그의 글솜씨를 빌려 의뢰인들이 전하려고 했던 것은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작가가 대필해 준 모든 의뢰인들이 편지 속에 담은 바람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을 이룬 소년도,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함을 축하하게 된 여자도 편지와 함께 자신들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전할 수 있었음에 만족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종종 편지지를 구입했었다. 특별히 쓸 사람을 정해놓지 않고도 그저 예뻐서, 언젠가는 쓸 날이 있겠지 하며 사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 오래지 않아 소모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음악과 그림까지 선택해 길어도 십 분이면 완성되는 이메일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또 언제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연말카드도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편지 쓰는 일 자체를 아주 오랫동안 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 아침, 기차역으로 나가기 전 어머니께 편지를 쓰면서 나는 작가의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직접 펜을 움직여 종이에 새기는 편지글은 말로 하기엔 어색하거나 부족한 듯 느껴지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편지가 주인에게 전해지기까지의 마음은 선물을 받듯 설레고 애틋해진다는 사실 또한 덤으로 말이다.
어머니가 편지를 발견하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서울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을 때 '편지 잘 읽었다'는 말씀도 없이 그저 따뜻한 어머니의 온기가 수화기를 통해서 전해질 뿐이었다.
올 연말엔 친하다는 이유로 오래, 그리고 자주 신세진 지인들에게 손수 편지를 보낼 참이다. 또 생각에서 그치지 않도록 내일은 퇴근길에 예쁜 편지지를 사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