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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와 본 포항역. 변했지만 나직한 모습만으로도 정겹다.
실로 오랜만에 와 본 포항역. 변했지만 나직한 모습만으로도 정겹다. ⓒ 이동환
첫 날 겨우 8km 걸어 포항시 흥해읍 옥성리에 짐을 풀다

@BRI@ 12시 48분 포항역에 도착했다. 기차 타고 오며 내내 생각하니 마누라가 은근히 괘씸하다. 동료강사들을 포함해 주변 사람 모두 걱정하는데 마누라만 '잘 다녀오셔!' 한 마디뿐이었다. 집 떠난다는데, 그것도 보름여를…, 아무래도 사랑이 식은 게지?

"나 없는 동안 문단속 잘 하고, 어머니 잘 부탁해. 그리고 제발 가스 중간밸브 좀 꼭 확인해! 그런데…, 당신 정말 걱정 안 돼?"
"걱정은 무슨? 당신이 오죽 꼼꼼하게 스스로 챙길 사람이야? 아주 속 시원하다. 이참에 나도 자유 좀 맛보자고요."


자유를 맛봐? 남편이 보름 동안 가출(?)한다는데 걱정은커녕 속 시원해? 등짐장수처럼 15kg 나가는 배낭을 메고 하루 15km씩 걷는다는데 뭐라? 솔직히 조금은…, 아니 많이 서운했다. 그러나 이내, 포항역 사진을 찍고 한참 부글거리던 나는 선배 말을 떠올리며 씩 웃고 말았다.

"나는 우리 마누라가 나를 너무 끔찍이 사랑해서(못 믿어서) 하루 외박도 난리가 나는데, 너는 제수씨가 포기했나보다(믿나보다)!"

내가 포항을 먼저 찾은 까닭은?

포항역사 지붕에서 해바라기 하는 비둘기들. 괜히 반가워 소리치니 힘찬 날갯짓으로 화답한다.
포항역사 지붕에서 해바라기 하는 비둘기들. 괜히 반가워 소리치니 힘찬 날갯짓으로 화답한다. ⓒ 이동환
'구 울릉도행 선착장', 냄새는 여전하다. 내가 열네 살 때 추위에 떨며 숨 막혀 하던 바로 그 냄새.
'구 울릉도행 선착장', 냄새는 여전하다. 내가 열네 살 때 추위에 떨며 숨 막혀 하던 바로 그 냄새. ⓒ 이동환
내가 겨울바다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태어나 처음 본 바다가 겨울바다요(속초 아바이 마을 앞바다), 어린 시절부터 낫살 먹을 때까지 소슬한 추억이 아리게 배어 있는 곳이 또한 겨울바다(유난히 동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뒤바람이 무서워도 고깃배는 언제나 출어준비를 한다. 그게 삶이다.
아무리 뒤바람이 무서워도 고깃배는 언제나 출어준비를 한다. 그게 삶이다. ⓒ 이동환
<학원(學園)>이란 잡지를 아시는지? 1952년 11월에 창간해 1979년 3월에 폐간되기까지 이 땅 거의 모든 학생들 마음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잡지! 사실, 중고등학생을 위한 잡지였지만 잔망한 것도 모자라 되바라졌던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탐독하고 있었다. 6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소위 '펜팔코너'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무섭게 달리는 차들을 피해 진땀 흘리며 '소티재'라는 고개를 넘고 보니 다섯 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서녘이 벌겋다.
무섭게 달리는 차들을 피해 진땀 흘리며 '소티재'라는 고개를 넘고 보니 다섯 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서녘이 벌겋다. ⓒ 이동환
이른바 '날림성(낚시질)' 자기 소개글에 낚여 난생 처음 편지를 쓰게 만들었던 아이. 부산시 동대신동에 살던 선영이. 그 아이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솔직히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서너 통 편지를 쓰다가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소위 '교환일기'를 받고 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사진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요즈막 시쳇말로 30초 '첫 느낌'에 '뻑' 갔다는 얘기지.

그는 모르지만 나는 점점 야릇한 감정에 빠진 듯하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무려 1년여를 그렇게 애틋하기만 했다. 그런데 열네 살 넘어가던 해 여름, '포항으로 갑자기 이사 갈 수밖에 없으니 나중에 먼저 연락할 게'라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이정표가 고맙기만 하다. 이제 바다로만, 바다로만 내달릴 차례다.
이정표가 고맙기만 하다. 이제 바다로만, 바다로만 내달릴 차례다. ⓒ 이동환
그게 끝이었다. 나는 거의 미쳐갔다. 열네 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거시기가 뭘 알아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학교 선생님들이 내 멍한 표정을 탓할 정도였으니까. 공부가 손에 잡힐 리 없었다. 교과서를 펴면 선영이 얼굴이 드러났다. 바싹 야윈 채 좀비 저리가라 할 정도가 되어 잠이라도 청할라 치면 천장에 그 아이 얼굴이 또록또록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했다. 그 해 겨울. 내 생애 처음 가출을 시도했다. 부자 간 세대 차이는 커도 어렵사리 대화는 이어가던 사이였다. 그러나 통사정을 올렸는데도 아버지는 '절대루 안 됨매. 지발 이 아바이 탕갯줄 좀 끊지 마라이. 니 시방…, 제 정신임둥?' 하시며 요지부동이었다. 바로 튄 거지 뭐. 돈도 별로 없이.

어찌어찌 포항까지 오기는 했는데…, 대책이 없었다. 그제야 무모한 여행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쓰린 가슴 부여안고 나는 무작정 바다를 찾았다. 그게 바로 '구 울릉도행 선착장'이다. 왜 그리 춥던지…. 사타구니가 꼬들꼬들 비틀어질 무렵 나는 비로소 수중에 돈이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선착장 된바람을 맞으며 생각한 게 파출소였다. 허든거리며 찾아들어가, 서울 가는 차표 좀 끊어달라고, 나중에 우체국으로 부쳐 드리겠다고, 우리 아버지가 행세깨나 하는 사업가라고…, 그 와중에 새살거릴 용기는 어디서 났는지, 아무튼 열네 살 설익은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쯤 아들딸 두엇 두고 참하게 사는 이 시대 어머니가 되었을 선영이!

내 마지막 사랑 잉걸엄마를 만나기까지

수컷본능 따위 나는 모른다. 다만 사내들은,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기 힘들다는 사실만 안다. 그게 수컷본능이라고 따져들면 할 말 없다. 어쨌거나 나 역시 좁쌀 시절부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헤아릴 수없는 방황을 했다. 20대, 역마살 잔뜩 끼어 허섭스레기처럼 날뛰었던 그 모든 시간 종점에 지금은 낯도 떠오르지 않는 몇몇 여자들이 있었다.

결국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내게는 물론 잉걸엄마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깟 사랑뿐이 아니라, 낫살 더 먹기 전에 무언가 '마음정리'가 필요해 길을 나섰다. 무모할 수도 있다. 학원에 처박혀 밥 버느라 앞뒤 분간도 못 하고 살아온 시간들. 이제 더 나이 먹기 전에 돈에 매달리지 않고, 치졸하지 않게 차분히 살 깜냥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이 힘든 여행을 포기할 수 없다.

잉걸엄마! 내 가출을 허락해줘서 고마워. 이왕 선심 쓰셨으니 벌써 욱신거리기 시작한 내 무릎에 '호…!' 해줘. 결국, 며칠 걷기 연습 더하기 실전 하루 만에 압박테이핑 치고 말았어. 이 무모한 여행이 다, 나중에 당신 무릎에서 숨 거두고 싶어서라는 사실만 알아줘요."

덧붙이는 글 | 추억 가운데 거론한 '선영이'는 어쩔 수없이 가명을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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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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