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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국제포경회의(IWC)에 맞춰 문을 연 '고래박물관'
2005년 5월 국제포경회의(IWC)에 맞춰 문을 연 '고래박물관' ⓒ 김준

포항과 함께 공업한국을 이끌었던 도시 울산을 생태도시로 바꾸려는 노력의 중심에 '고래'가 있다.

호미곶을 지나 구룡포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장생포까지 오면서 이곳저곳 포구 마을을 기웃거렸다. 포구의 아침은 분주했다. 한두 척 오징어 배들이 들어와 오징어를 쏟아내고 식구미를 챙겨 총총히 사라지고, 소라를 잡은 배들은 경매를 하는 판장에 상자를 쏟아놓는다.

물안개를 헤집고 떠오른 아침 해가 바다를 깨울 무렵, 물질하는 해녀의 오리발이 허공을 가른다. 바닷가로 밀려온 해초를 줍는 할머니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흔든다. 배가 고프다.

일부러 늦은 점심을 각오하며 장생포를 찾은 것은 고래고기를 먹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먹어보지도 못한 고래고기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생리적으로 가능한 현상인가.

고래, 신화와 전설을 벗다

@BRI@'고래'라는 낱말 뒤에서는 수백 년 동안 신비와 공포가 따라 다녔다. 고래에 관한 최초 기록은 성경이지만, 고래의 특성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16세기 무렵이었다.

중세 아일랜드 선원 중에는 '악마고래'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래라는 말이 두려워 '대어'라는 말로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사람고기 맛을 본 고래는 같은 장소에서 1년 내내 사람사냥을 하기 위해 기다린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고래가 배를 침몰시킨 적이 있는 얕은 여울목은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뱃사람 중에는 잠든 고래 등을 섬으로 잘못 알고 올라갔다가 익사했다는 말도 전한다.

처음 고래를 포유류로 분류한 사람은 B.C. 4세기 무렵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 후 1600년 동안 고래가 물고기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다시 포유류로 분류한 것은 1758년 프랑스 박물학자 샤를 드 린네였다. 이 후 프랑스 동물학자 퀴비의 "고래는 뒷다리가 없는 포유동물이다"라는 주장이 나왔고, 18세기 동물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고래에 대한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고래는 인간과 같은 포유류에 속한다. 학자들은 고래의 뼈와 육지동물의 뼈를 비교해 고래가 육지에서 시작된 포유동물임을 밝혀냈다. 앞다리가 가슴지느러미로 변했지만, 그 속에 포유류의 원형인 5개의 발가락뼈(퇴화되어 4개인 경우도 있다)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뒷다리가 변형된 꼬리지느러미는 물고기와 달리 수평으로 달려, 수면과 바다 속 깊은 곳을 자유로이 오르내릴 수 있다. 고래가 주로 먹는 것은 젓새우 등과 갑각류와 무리를 지어 서식하는 작은 물고기 등이다. 이빨고래류는 민물에 사는 새우·게·오징어 등을 먹는다.

고래는 금실이 좋고, 가족애와 동료애가 강하기로 유명하다. 폐로 호흡하며 자궁 내에서 태아가 자란다. 암컷은 배 아래쪽에 한 쌍의 젖꼭지가 있어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운다. 고래는 한 번에 한 마리씩 출산하며, 새끼 고래가 태어나면 동료고래들이 수면 위로 밀어 올려 호흡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래는 일부일처이며 임신기간은 보통 1년이지만 향유고래는 16개월, 혹등고래 10개월 등이 걸린다. 모성애가 강해서 새끼고래가 잡히면 어미고래나 아빠고래가 배 주위를 떠나지 않다가 포경선에 잡히기도 한다. 고래의 모성애에 감동해 일본의 한 사찰에서는 잡은 고래에서 나온 새끼를 화장해 납골하고 공양하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허파로 숨을 쉬며 바다에 사는 고래는 얼마나 깊은 곳까지 잠수를 하며, 물 속에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향유고래는 수심 1000m까지 긴수염고래류는 150m까지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수기간도 긴수염고래는 10여분, 소형 이빨 고래는 3~10분, 항유고래는 30~60분 정도에 이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2가지 맛의 고래

고래를 잡는 포경선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포수, 이들은 전문직업인이었다.
고래를 잡는 포경선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포수, 이들은 전문직업인이었다. ⓒ 김준
강구항에서 너무 많은 지출을 하고 대게를 먹었다. 장생포에서 눈치껏 3만원에 수육을 시켰다.

장생포 식당에는 수육 외에 육회·생고기·배 부위· 꼬리 부위·모둠(수육+배부위+생고기) 등으로 나누어 판매하고 있다. 고래해장국도 나온다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주문을 했다. 물론 소주도 한 잔 곁들였다.

고래는 부위별로 열두 가지 별미를 낸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내리고, 등푸른 생선처럼 심혈관계 질환 예방 효과가 있다. 특히 고래는 식용고기 가운데 철분이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어 산모의 빈혈을 예방하는 치료효과가 있다.

고래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인으로 비난할지 모르지만 고래문화를 이해하고, 장생포에서 고래고기를 파는 사람들의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맛이 궁금해 먹어보고 싶었다.

장생포에 공급되는 고래는 그물에 들어와 익사한 고래이거나 해안으로 몰려온 것들이다. 이런 고래들은 경매를 통해서 팔려 식당에 공급된다. 이렇게 공급되는 고래가 1년에 수백 마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물에 걸린 고래는 경매를 통해서 수천 만 원에 판매된다. 고래는 어민들 사이에는 바다의 '로또'로 통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래가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놓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한다.

고래, 유럽의 어둠을 밝혔다

1974년 8월23일 독도근해에서 진양호가 잡은 22m 크기의 참고래다(장생포 한 식당에 걸린 사진).
1974년 8월23일 독도근해에서 진양호가 잡은 22m 크기의 참고래다(장생포 한 식당에 걸린 사진). ⓒ 김준
작살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모습(고래박물관)
작살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모습(고래박물관) ⓒ 김준
울산의 반구대암각화를 보면, 농경과 목축업이 발달하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고래를 낮은 바닷가로 몰아 그물과 창을 이용해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에는 장생포는 물론 울산 대부분이 바다였고, 멀리 태화강 상류까지 물길이 이어졌다. 고래가 내만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새끼를 낳고 길렀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장생포 일대의 울산만은 고래의 산란과 양육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고래를 몰아 잡거나 도망가는 고래를 쫓아 찾아다니며 사냥이 본격화되었을 것이다. 선사인들은 고래가 고기뿐만 아니라 기름이 더 쓸모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석유가 일반화되기 전 유럽사회의 어둠을 밝혔던 것은 고래기름이었다.

정밀기계를 움직이는 윤활유로도 이용되었다. 이런 기름을 경유(鯨油)라 한다. 보통 수염고래 기름살·혀·내장·뼈 등을 끊이거나 압착하여 만든다.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정어리고래 등 수염고래의 기름은 마가린·비누 등을 만든다. 반면 향유고래, 돌고래 등 이빨고래류는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공업원료로 이용된다.

그 밖에 글리세린·양초·합성수지·화장품·향수·의약품·호르몬제·여성 코르셋 등 500여 가지 공산품의 원재료도 활용되었다. 고래는 버릴 것이 없는 자원이었다.

최고의 전문직업인 '포수'

포경선에서 가장 대접을 받는 사람은 선장이 아니라 '포수'다. 30~40여 년 전 한 달에 100만원 이상의 월급을 받았던 사람들이며, 능력있는 포수는 포경선 선주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였다. 큰 돈을 만지려고 배를 타는 젊은이들이 꿈꾸는 최고의 자리가 그 자리였다. 포수가 잡은 고래를 나눌 때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평생 포경선을 타며 고래를 잡으며 살아왔다는 흑산도의 한 노인도 포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불을 한 번도 당겨보지 못하고 포경선에서 내려왔다. 그 노인은 "포수를 할 만한 충분한 경력을 갖췄지만 전라도 사람이라고 포수가 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포경선이 대부분 경상도 배였기 때문에 자신이 꿈을 이룰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포경선의 짓가림(뱃사람들이 어획량을 나누는 방식)은 포획한 고래의 양에 따라 결정되기도 했다. 잘난 포수를 만나면 두둑한 봉투를 챙기지만 불질을 잘못하는 포수를 따라다니면 고생만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포수의 주가는 하늘을 찔렀고,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높은 몸값을 자랑했다. 오죽했으면 '장생포 포수, 울산군수하고도 안 바꾼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고래잡이 열 올리더니 이제 보호하자고?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고래박물관)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고래박물관) ⓒ 김준
고래를 잡는 포경포 작살(고래박물관)
고래를 잡는 포경포 작살(고래박물관) ⓒ 김준
18세기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일본 등 열강들이 일찍부터 고래잡이에 적극 나섰던 것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고래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북대서양과 북태평양의 고래자원을 고갈시킨 이들이 눈을 돌린 것은 우리 바다였다.

1849년 우리 바다로 고래잡이를 나선 미국 포경선의 포경일지에는 "아주 많은 고래, 많은 고래, 아주 많은 혹등고래, 아주 많은 대왕고래, 한 무리의 참고래, 아주 많은 긴수염고래, 사면팔방에 고래, 고래가 무수히 보였다"라고 적고 있다.

1899년 일본의 한 포경선의 항해일지에는 "영일만 동북동 20마일 해역에 30~40마일에 걸쳐 고래뿐이었다, 배가 빨리 갈 때는 고래 등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고래가 배를 향해 오기도하였다, 그 수를 따지면 몇 천두에 달하여"등과 같은 기록이 있다(김장근, <고래와 한국문화> 참조).

가장 널리 알려진 고래잡이는 많은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발견하면 작살을 꽂은 다음 고래가 지칠 때까지 쫓아다니다 잡는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고래 떼를 해안으로 몰아 잡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최고속정이 등장해 한해에 수만 마리의 고래가 포획되었다. 여기에 고래를 찾는 첨단장비들이 갖춰지고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전문공장이 설치되자 고래의 남획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일부 종은 개체 수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장생포에 정박중인 포경선들(고래박물관)
장생포에 정박중인 포경선들(고래박물관) ⓒ 김준
마지막까지 고래를 잡았던 포경선 진양 6호
마지막까지 고래를 잡았던 포경선 진양 6호 ⓒ 김준
고래를 살리자는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이 무렵 고래가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라 가족, 친구가 있고 그들만의 언어가 있는 지적 포유동물임이 밝혀졌다. 특히 작살에 맞고 붉은 피를 흘리며 몸부림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고래를 살리자는 운동은 더욱 확산됐다. 2000년 우리나라 근해에서 확인된 고래는 7종 2000여 마리에 이르며 근해에서 그물에 걸려 익사하는 고래가 한 해 평균 100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마침내 1946년 고래자원의 관리와 포경업을 규제하기 위한 국제포경조약이 체결되었다. 포경조약은 멸종위기에 처한 고래의 포획금지, 마릿수 및 크기 제한, 조업 해역 및 시기 제한 등을 규제하였다. 그리고 1982년 상업적 목적의 포경을 전면금지해 1986년부터 효력이 발휘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학술 목적이라는 이름으로 고래를 잡고 있으며, 노르웨이는 해마다 마을 가까이 해안으로 이동하는 고래를 사람들이 총출동하여 작살과 갈고리를 잡는 '축제'(?)를 벌이고 있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것인가

2005년 5월 국제포경회의(IWC)를 유치한 울산시가 생태도시로 전환을 시도할 무렵 고래고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은 '포경재개'를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2005년 5월 국제포경회의(IWC)를 유치한 울산시가 생태도시로 전환을 시도할 무렵 고래고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은 '포경재개'를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 김준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소장 김장근)는 내년 4월부터 우리나라에서 고래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울산 앞바다에서 관경(觀鯨·Whale Watching)사업을 시범실시할 계획이다. 이미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이 개관을 했고, 다모포에는 고래생태마을을 준비 중이다.

세계적으로 고래를 관찰하는 프로그램에 수백 만 명이 참여해 10억 달러의 수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해역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고래는 모두 100여 종에 이른다. 이들 고래 중 우리가 주목할 만한 고래는 우리나라 해역에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한국계 고래(Korea gray whale)라고 붙였진 귀신고래다.

반구대에 기록된 고래들도 귀신고래로 추정된다. 19세기 일본 포경선단이 우리 해역에 들어와 잡은 고래도 대부분 귀신고래였다. 귀신고래는 특히 사람들과 친했다. 해변 가까운 곳에 곧잘 나타났고, 수면 위로 뛰어오르며 재롱을 부리기도 한다고 전한다.

바위가 많은 곳에서 귀신처럼 나타난다고 해서 귀신고래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1977년 울산 앞바다에 모습을 보인 이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고래는 겨울이면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의 바다에서 산란을 하고 여름에 오츠크해 북단으로 이동한다. 우리나라는 1962년 강원도와 경상남북도의 귀신고래 회유해면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귀신고래를 기다리고 있다.

내년부터는 고래관광 상품을 개발할 것이라고 한다. 이제 고래만 출현해주면 멋진 시나리오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양생태 환경이다. 고래가 다시 나타날 수 있는 해양환경을 마련하지 않는 한 고래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고래가 지나는 길목 곳곳에 그물들이 막고, 해양오염과 개발로 고래먹이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관광상품을 만들고 고래를 기다리는 일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고래가 다시 올 수 있도록 바다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가장 먼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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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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