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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항 가는 길. 산속에 오도카니 고개를 내민 집 한 채가 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저기도 사람이 사나? 저 외진 곳에서? 무얼 해먹고 살지?
죽변항 가는 길. 산속에 오도카니 고개를 내민 집 한 채가 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저기도 사람이 사나? 저 외진 곳에서? 무얼 해먹고 살지? ⓒ 이동환
지난 밤, 너무 늦게 잠이 들었다. 두 꼭지 글 쓰느라 밤을 거의 밝힐 뻔 했다. 새벽에 노트북 들고 PC방에 다녀오느라 잠이 더 늦었다. 눈 떠보니 아침 9시. 오탈자가 생각 나서 부랴부랴 PC방에 다시 갔다가 농협 들러 돈 좀 찾고 죽변항까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차라리 쏟아지지, 는적는적 빗방울이 듣는다. 꾸부정한 하늘은 아예 잿빛이다. 바람도 만만찮다. 우산도 소용없다. 차라리 젖기로 했다.

@BRI@이 여행 주목적은 걷는 거다. 하루 최소 15km. 헬스클럽 러닝머신이라면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종이 한 장도 무거운 판에, 줄였다고는 하나 10kg이 넘는 배낭 메고 바닷바람 가로지르며 걷는 건 좀 다르다. 더구나 인도도 없는 길을, 쌩쌩 달리는 차 피해가며, 때로는 겁 잔뜩 먹고 긴장한 채 걷는 게 장난이 아니다. 벌써 몸 구석구석 파스 천지다. 나이를 실감할밖에. 그런데 이 글 쓰기 바로 직전에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글쓰기에 의존하여 더 좋은 풍광 놓치지 말 것!”

한참 생각해본다. 존경하는 친구 말이니 새겨야 한다. 그러나 그 친구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내가 왜 힘든 여행 중에 매일 글 쓸 생각을 했는지. 그건 바로 나 자신을 닦달하기 위함이다. 매일 일기든, 잡기든, 쓰지 않으면 이 여행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의지 강한 보통 사람들이야 혼자 먹은 맘 잘 지키겠지만, 자유분방하다 못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는 ‘걸림’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쓰는 거다.

포효하는 바다에 빠져 비 젖는 줄도 모르다

온양리 앞 바다. 비바람에 너울마다 갈기를 세우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겸허해진다.
온양리 앞 바다. 비바람에 너울마다 갈기를 세우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겸허해진다. ⓒ 이동환
죽변항 가는 길, 온양리 앞 바다를 보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잿빛 큰 너울이 장관이다. 내가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쿠르르르, 콰광! 쏴아, 처얼썩, 쿠더덩!”

파도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푸덕거리는 빗방울 따위 나그네 귀때기밖에 못 때린다. 바람이라기보다 폭풍에 가깝다. 눈 뜨기 힘들 정도다. 문득, 내가 바삐 사는 시간에도 바다는 늘 저랬겠구나, 위대한 갈기를 세우고 인간 하나쯤 웃어넘겼겠구나, 그것도 모른 채 아등바등, 미미한 존재인 나는 허둥거리며 살았구나, 생각해본다.

봉평해수욕장. 그 쓸쓸함을 어떤 색깔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 같아 차라리 흑백으로 찍었다.
봉평해수욕장. 그 쓸쓸함을 어떤 색깔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 같아 차라리 흑백으로 찍었다. ⓒ 이동환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봉평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가 300m도 안 되지만, 덕천리 백사장에서 후정리와 봉평리, 온양리까지 10km에 이르는 백사장이 이어져 있어 나름대로 한 몫 한다. 소나무와 깨끗한 모래밭이 자랑이다. 물이 깊고 고르지 않아 사고 위험이 많다는 게 흠이지만 여름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다. 인적 끊어진 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이거 호사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변항구에서 더욱 작아지다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항. 날씨 탓에 큰 배 작은 배 할 것 없이 모두 한가하다.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항. 날씨 탓에 큰 배 작은 배 할 것 없이 모두 한가하다. ⓒ 이동환
잿빛 하늘과 바다, 포효도 아랑곳없이 빨간 몸통으로 우뚝 서 있는 등대. 작지만 깐보기 힘든 위세가 느껴진다.
잿빛 하늘과 바다, 포효도 아랑곳없이 빨간 몸통으로 우뚝 서 있는 등대. 작지만 깐보기 힘든 위세가 느껴진다. ⓒ 이동환
죽변항 양쪽을 지키는 흰 등대와 빨간 등대. 멀리서 보면 꼭 장난감 같다.
죽변항 양쪽을 지키는 흰 등대와 빨간 등대. 멀리서 보면 꼭 장난감 같다. ⓒ 이동환
험한 날씨에 갈매기들은 어쩌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방파제를 터 삼아 버티고 있었다.
험한 날씨에 갈매기들은 어쩌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방파제를 터 삼아 버티고 있었다. ⓒ 이동환
그물 손질에 여념 없는 아주머니. 낯선 객 말 걸기에도 싫은 표정이 없다.
그물 손질에 여념 없는 아주머니. 낯선 객 말 걸기에도 싫은 표정이 없다. ⓒ 이동환
죽변항구는 ○자형으로 생겼다. 험한 날씨에도 밖에서 그물 손질하는 아낙이 눈에 들어왔다. 손놀림이 여간 잰 게 아니다.

“아주머니! 안 추우세요?”
“춥지요. 추워도 해야 하니더.”

“바다에도 나가시나요?”
“아무요. 날 좋으면 남편이랑 바다 나가니더.”


가자미나 대구를 주로 잡는다는 아주머니. 귀찮을 법 한데도 손 따로, 눈 따로, 귀 따로, 입 따로…, 달관이 따로 없다.

“고기는 잘 잡히나요?”
“어데요. 배운 기 이뿐이라 하니더. 그나 아재는 어데 가니겨?”


가는 곳마다 내 행색이 궁금한가 보다. 하기야 행색은 남루한데 막노동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고, 한겨울에 혼자 어슬렁거리는 게 눈에 띄겠지. 아들도 있고, 아내도 있고, 어머니도 계시고…, 무슨 면접 보듯 한참 주워섬기자니 아주머니가 대뜸 한 마디 한다.

“살기 편한갑네요.”
“편하기는요? 요즘 살기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나요?”

“힘들다, 힘들다, 뱃사람맨키 힘드니겨?”
“…….”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이바구 더 나누고 사진 찍어도 좋겠냐고 여쭙자 정면만 아니면 된다며 씩 웃는다.

겨울 해는 너무 짧다

2004년 SBS를 통해 방송되었던 드라마 <폭풍 속으로> 촬영 세트장. 죽변항 북쪽으로 1km 정도 거리, 야트막한 산 아래 있다.
2004년 SBS를 통해 방송되었던 드라마 <폭풍 속으로> 촬영 세트장. 죽변항 북쪽으로 1km 정도 거리, 야트막한 산 아래 있다. ⓒ 이동환
깎아지른 절벽 위 위태로운 세트장 집 한 채. 낯선 나라 냄새가 물씬 난다.
깎아지른 절벽 위 위태로운 세트장 집 한 채. 낯선 나라 냄새가 물씬 난다. ⓒ 이동환
울진에서 죽변항까지 비바람 뚫고 걷는 데만 진을 다 쏟았다. 죽변항 돌아보기도 만만찮아 <폭풍 속으로> 세트장까지 가보고 나니 벌써 어둑어둑하다. 오늘은 아무래도 여기 아무데서나 묵어야겠다. 그나저나 내일 삼척항에 가야 하는데 눈이 오신단다. 날씨가 도통 나그네를 도와주지 않는다. 방을 잡고 배낭을 내려놓으니 어깨가 축 늘어진다. 힘든 하루였다. 힘들어? 문득, 아까 만난 아주머니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정…, 뱃사람맨키 힘드니겨?”

덧붙이는 글 |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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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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