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너무 늦게 잠이 들었다. 두 꼭지 글 쓰느라 밤을 거의 밝힐 뻔 했다. 새벽에 노트북 들고 PC방에 다녀오느라 잠이 더 늦었다. 눈 떠보니 아침 9시. 오탈자가 생각 나서 부랴부랴 PC방에 다시 갔다가 농협 들러 돈 좀 찾고 죽변항까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차라리 쏟아지지, 는적는적 빗방울이 듣는다. 꾸부정한 하늘은 아예 잿빛이다. 바람도 만만찮다. 우산도 소용없다. 차라리 젖기로 했다.
@BRI@이 여행 주목적은 걷는 거다. 하루 최소 15km. 헬스클럽 러닝머신이라면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종이 한 장도 무거운 판에, 줄였다고는 하나 10kg이 넘는 배낭 메고 바닷바람 가로지르며 걷는 건 좀 다르다. 더구나 인도도 없는 길을, 쌩쌩 달리는 차 피해가며, 때로는 겁 잔뜩 먹고 긴장한 채 걷는 게 장난이 아니다. 벌써 몸 구석구석 파스 천지다. 나이를 실감할밖에. 그런데 이 글 쓰기 바로 직전에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글쓰기에 의존하여 더 좋은 풍광 놓치지 말 것!”
한참 생각해본다. 존경하는 친구 말이니 새겨야 한다. 그러나 그 친구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내가 왜 힘든 여행 중에 매일 글 쓸 생각을 했는지. 그건 바로 나 자신을 닦달하기 위함이다. 매일 일기든, 잡기든, 쓰지 않으면 이 여행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의지 강한 보통 사람들이야 혼자 먹은 맘 잘 지키겠지만, 자유분방하다 못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는 ‘걸림’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쓰는 거다.
포효하는 바다에 빠져 비 젖는 줄도 모르다
죽변항 가는 길, 온양리 앞 바다를 보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잿빛 큰 너울이 장관이다. 내가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쿠르르르, 콰광! 쏴아, 처얼썩, 쿠더덩!”
파도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푸덕거리는 빗방울 따위 나그네 귀때기밖에 못 때린다. 바람이라기보다 폭풍에 가깝다. 눈 뜨기 힘들 정도다. 문득, 내가 바삐 사는 시간에도 바다는 늘 저랬겠구나, 위대한 갈기를 세우고 인간 하나쯤 웃어넘겼겠구나, 그것도 모른 채 아등바등, 미미한 존재인 나는 허둥거리며 살았구나, 생각해본다.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봉평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가 300m도 안 되지만, 덕천리 백사장에서 후정리와 봉평리, 온양리까지 10km에 이르는 백사장이 이어져 있어 나름대로 한 몫 한다. 소나무와 깨끗한 모래밭이 자랑이다. 물이 깊고 고르지 않아 사고 위험이 많다는 게 흠이지만 여름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다. 인적 끊어진 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이거 호사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변항구에서 더욱 작아지다
죽변항구는 ○자형으로 생겼다. 험한 날씨에도 밖에서 그물 손질하는 아낙이 눈에 들어왔다. 손놀림이 여간 잰 게 아니다.
“아주머니! 안 추우세요?”
“춥지요. 추워도 해야 하니더.”
“바다에도 나가시나요?”
“아무요. 날 좋으면 남편이랑 바다 나가니더.”
가자미나 대구를 주로 잡는다는 아주머니. 귀찮을 법 한데도 손 따로, 눈 따로, 귀 따로, 입 따로…, 달관이 따로 없다.
“고기는 잘 잡히나요?”
“어데요. 배운 기 이뿐이라 하니더. 그나 아재는 어데 가니겨?”
가는 곳마다 내 행색이 궁금한가 보다. 하기야 행색은 남루한데 막노동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고, 한겨울에 혼자 어슬렁거리는 게 눈에 띄겠지. 아들도 있고, 아내도 있고, 어머니도 계시고…, 무슨 면접 보듯 한참 주워섬기자니 아주머니가 대뜸 한 마디 한다.
“살기 편한갑네요.”
“편하기는요? 요즘 살기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나요?”
“힘들다, 힘들다, 뱃사람맨키 힘드니겨?”
“…….”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이바구 더 나누고 사진 찍어도 좋겠냐고 여쭙자 정면만 아니면 된다며 씩 웃는다.
겨울 해는 너무 짧다
울진에서 죽변항까지 비바람 뚫고 걷는 데만 진을 다 쏟았다. 죽변항 돌아보기도 만만찮아 <폭풍 속으로> 세트장까지 가보고 나니 벌써 어둑어둑하다. 오늘은 아무래도 여기 아무데서나 묵어야겠다. 그나저나 내일 삼척항에 가야 하는데 눈이 오신단다. 날씨가 도통 나그네를 도와주지 않는다. 방을 잡고 배낭을 내려놓으니 어깨가 축 늘어진다. 힘든 하루였다. 힘들어? 문득, 아까 만난 아주머니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정…, 뱃사람맨키 힘드니겨?”
덧붙이는 글 |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