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꾸만 줄어드는 나의 삶
아둥바둥 사지를 틀면 틀수록 자꾸만 똑똑 부러지는 하루
날이 갈수록 점점 쪼그라드는 황토빛 맨살
꺼멓게 타들어가는 나의 심장
이른 새벽, 시퍼런 칼날에 내 몸을 갖다댄다
황토빛 맨살로 뚝뚝 떨어지는 슬픔
꺼먼 피 뚝뚝 흘리며 뾰족히 일어서는 아픔
허우적 허우적 너를 그린다
눈물처럼 촉촉한 네 눈동자를 그리다가
기다림처럼 오뚝 솟은 네 코를 그리다가
성에처럼 차디찬 네 입술을 그리다가
그만 자빠져 무르팍이 깨진다
좋다 널 그리다가 이대로
내 맨살 몽땅 다 닳아 없어질지라도
내 심장 뿌리까지 몽땅 다 뽑힐지라도
너 향한 그리움 끝내 접을 수 없다
이대로 절뚝이며 절뚝이며 나아가다가
마침내 까만 피거품 토하고 쓰러질지라도
마침내 네 목숨 훠이훠이 꺼멓게 흩날릴지라도
너 향한 사랑 끝내 버릴 수 없다
- '몽당연필 1' 모두
<명예의 전당> 선정, 독도 여행, <음식사냥 맛사냥> 100회 돌파
@BRI@이 시는 딸아이의 몽당연필을 깎아주면서 쓴 시다. 이 시는 지난 4월, 12년만에 나온 나의 네 번째 시집 <바람과 깃발>(바보새)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시다. 왜 내가 이 시를 아끼느냐 하면 깎으면 깎을수록 자꾸만 짧아지는 몽당연필이 식의주를 위해 몸부림치면 칠수록 자꾸만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면서 나이만 먹어 가는 내 인생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2002년 5월 16일, 이선관 시집 <배추 흰나비를 보았습니다>란 책동네 기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오마이뉴스>에 1270꼭지가 넘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 올 초에는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2005년 1월 31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던 <음식사냥 맛사냥>도 100회를 넘겼다. 그리고 평소에 꼭 한번 가고 싶었던 독도도 다녀왔다. 올해 나의 삶 중에서 이 세 가지를 빼놓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나만의 특종'을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지난 1994년 세 번째 시집을 펴낸 뒤 12년만에 펴낸 네 번째 시집 <바람과 깃발>일 것이다. 나는 이 시집을 낼 때 마치 첫 시집을 내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내가 펴낸 세 권의 시집(<노동의 불꽃으로> <홀로 빛나는 눈동자> <어머니, 누가 저 흔들리는 강물을 잠재웁니까>)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1996년 겨울, 서울에서 창원으로 낙향을 할 때 나의 시집과 내가 보관하고 있었던 책 3000여 권을 후배에게 맡겼다. 근데,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그 책들을 찾기 위해 후배를 찾았으나 통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리 저리 수소문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 후배의 행방을 찾다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하는 생각을 곱씹으며.
서울과 마산에서 두 번 열린 시집 출판기념회
나의 네 번째 시집 <바람과 깃발>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나왔다. 지난 2005년 봄에 나와야 할 시집이었는데, 해설을 맡은 분이 워낙 바빠서인지 1년을 끌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11년만에 나올 시집이 결국 12년만에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오랜만에 나온 나의 시집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흐뭇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를 새롭게 되찾은 것 같았다.
지난 4월, 나의 시집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군더더기도 더러 눈에 띄었고, 아직 발효가 덜 된 시들도 몇 편 있었다. 근데도 그 시집을 받아든 문단의 선후배들이 나보다 훨씬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김명수, 윤재걸, 홍일선, 박몽구, 김창규 시인, 그리고 작가 윤정모, 박도 선생님 등은 "이제 이소리 시인이 다시 문단의 품으로 돌아왔구나"하며 몹시 즐거워했다.
특히 홍일선, 이승철 시인과 한복희(전 탑골 대표) 누님, 마산의 박영주(시민운동가), 춤꾼 박은혜 등은 마치 자신의 시집이 나온 것처럼 내 시집 <바람과 깃발> 출판기념회까지 마련해줬다. 그러니까 나는 시집 한 권을 내고 여러 문단 선후배들과 출판인, 벗들에게 둘러싸여 서울과 마산에서 두 번에 걸친 책 잔치를 열었다. 그랬으니, 이 또한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때, 서울의 책 잔치에는 구순의 이기형(시인) 선생과 문학평론가 임헌영, 작가 윤정모, 정소성, 김중태, 박도, 두밀리 자연학교 채규철 박사 등 문단의 여러 선후배 100여 명이 참석해 나의 시집 출간을 축하해줬다. 마산에서는 이광석, 오하룡, 정규화 시인, 수필가 정목일, 마산문화방송 박진해 사장, 상연 스님, 고승하 작곡가, 배대화 교수, 학교 반창, 나의 친형과 친동생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축배를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 이소리. 본명은 이종찬이다. 나는 1959년 12월 4일(음) 경남 창원군 상남면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때 나의 아버지(이흥조)와 어머니(임수자)는 3∼400평 남짓한 논밭을 가지고 있었으나 식의주를 해결하기가 힘들어 마을 지주에게 부탁해 1000여 평 남짓한 갈라먹기 농사를 더 짓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의 부모님은 우리 4남1녀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논밭에 나가 뼈가 바스라지게 일했던 것이다. 오죽 농삿일이 고되었으면 어머니께서는 저녁때마다 우리 형제들에게 여기저기 쑤시는 팔과 다리를 꼭꼭 밟게 하셨고, 아버지께서는 매일 저녁때마다 댓병 소주를 커다란 밥그릇에 따라 드시며 취한 몸으로 하루의 피로를 이겨내곤 하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했다. 내가 처음 글을 써서 상을 받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마을 건너 상남교회에서 열린 '여름성경학교'에서였다. 그때 '예수'란 글을 써서 장원을 한 뒤 라면 한 박스와 양과자 등을 상품으로 받았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교내 글쓰기 공모에서 '무지개'란 시를 써서 상을 받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꿈은 시인이나 소설가보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때 미술 선생으로 허청륭(화가)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어떤 대상을 그리고자 할 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래 지켜 보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늘상 내게 "글쟁이나 그림쟁이는 돈 많은 집안의 자식들이나 여가로 하는 짓거리"라며 "그런 짓을 하면 커서 굶어 죽기 십상이다"는 말씀을 하셨다.
시인 이선관, 그리고 8년 동안의 고된 공장생활
그때부터 나는 화가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 16색이 든 예쁜 크레파스나 16색깔을 내는 물감을 살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어 그림 그리기에 매달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글쓰기까지는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화가의 꿈은 접었지만 글쓰기는 돈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공책 빈칸에 펜으로 적으면 그만이었다.
고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고2때부터 나는 <경남매일>과 <국제신문>에 있는 '학원광장'과 '독자의 시'란에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서울의 <독서신문>에도 시를 발표했다. 그때 만난 시인이 이선관(1942∼2005)이었다. 나는 까만 교복을 입고 까까머리로 이선관 시인을 만나면서 월북시인들의 시도 읽을 수가 있었고 김지하, 신경림, 양성우 등 참여시인들의 시도 읽게 되었다.
내가 '삶이 곧 시'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 것도, 노동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선관 시인을 만나면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고교를 졸업한 나는 창원공단에 있는 한 공장에 들어가 병역특례라는 올가미에 갇혀 8년 동안이나 일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나는 고된 공장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시를 썼다. 계속되는 잔업과 철야, 특근 등으로 시달리는 나 자신을 시 쓰기로 달랬다.
<윤슬> <사향> <시심> <불씨> <자유문학> <공단문학회> 등 공장 안팎에서 문학동아리를 수없이 만들고, 진보적 무크지 <마산문화>에 참여한 것도 열악한 노동 환경과 고된 공장생활에 대한 울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0년 7월, 나는 함석헌 선생이 펴내던 <씨알의 소리>에 시 '개마고원'과 '13월의 바다' 등 3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마이뉴스>가 잊어버린 나의 시심에 불지르다
1986년 2월, 나는 마침내 병역특례의 올가미를 벗어 던지고 8년 동안의 공장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마산, 양산, 부산 등지로 직장을 찾아 떠돌다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10여 년에 걸친 나의 서울살이와 문단활동이 시작되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간사를 거쳐 한길사 '한국문학예술대학' 사무국장, 계간 <시와사회> 편집인 겸 주간 등을 거치면서 시집도 세 권이나 냈다.
하지만 나는 '단군이래 최대의 불황'을 맞은 출판계의 현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서울에서 이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빚만 잔뜩 짊어지고 고향인 창원으로 낙향했다. 1986년 그해 겨울, 나는 비참한 마음으로 아내와 두 딸을 처가에 맡겨놓고 울산으로 갔다. 다행히 고향의 벗들이 <울산일보> 문화부에 내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신문사도 2년 남짓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처음엔 제법 잘 나가는 것 같았던 신문사가 IMF를 맞으면서 월급이 3∼4개월씩 밀리는 것은 보통이었고, 급기야 신문 발행까지 중단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족들의 식의주를 위해 대구, 경주, 양산, 부산, 마산 등지로 일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2000년부터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찰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하기도 했다.
2002년 5월, 그때 만난 인터넷신문이 바로 <오마이뉴스>였다. 나는 그때부터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동네, 사는이야기, 문화 등의 기사를 쓰면서 그동안 식의주 때문에 팽개치고 있었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가 10여 년 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시심(詩心)에 다시 불을 지른 것이다. 그렇게 해서 12년만에 나온 시집이 나의 네 번째 시집 <바람과 깃발>(바보새)이었다.
나는 글에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나의 두 번째 장편소설 <칠년의 사랑>의 출간(내년 1월 말)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음식기사와 여행기사, 사는이야기 등을 내년에는 모두 책으로 묶어내려 한다. <오마이뉴스>에 실은 글들은 그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하자는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인세 없이 출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요즈음 들어 다행스럽게도 인세를 제대로 주고 출판을 하겠다는 출판사들이 몇 나서고 있다. 나는 올해 '나만의 특종'으로 12년만에 나온 나의 네 번째 시집 <바람과 깃발>을 꼽으면서, 다시 내년 '나만의 특종'을 잡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비록 "글만 써서라도 가족들 배고프지 않게 먹고 살 수 있는 그날"이 다가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유일한 희망인 글을 쓸 것이다.
내가 쓰는 여러 글들이 비록 이 세상의 티끌 하나 제대로 쓸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글에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곧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드는 내가 그나마 이 세상에서 재주깨나 부릴 수 있는 것이 글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꿈꾼다. 언젠가 나의 글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고, 글만 써서라도 배곯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아나
그기 뭐꼬?
내 맴이다
니는?
니 맴을 가꼬 안 있나"
- '사랑' 모두
덧붙이는 글 | '2006, 나만의 특종' 공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