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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추억 덩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소중한 추억 덩어리가 될 것 같습니다. ⓒ 김관숙
"어, 선물! 새해 다이어리야"

외출했던 남편이 들어오더니 불쑥 비닐봉투에서 2007년 다이어리 한 권을 꺼내 내밀었습니다.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른 다이어리를 펴보지를 못하겠습니다. 겉표지에 '유즈어리'라고 써 있습니다. 유즈어리가 뭐지? 넘겨보았습니다. 뜻은 모르겠지만 속은 그게 그거입니다.

근래 들어서 남편은 내게 별 거 아닌 것을 줄 때도 꼭 '어, 선물!'하면서 줍니다. 공짜로 얻은 달력을 내놓을 때도, 누군가의 생일잔치에 갔다가 받아온 떡을 내놓을 때도 심지어는 우편함에서 빼온 각종 고지서며 편지들을 건네주면서도 그렇게 말을 합니다. 아무튼 손에 들고 들어온 것들은 모두가 '어, 선물!'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는데 자꾸 듣다가 보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지면서 '또 뭘 들고 들어왔네'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런지 유즈어리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진짜 반가운 선물임에도 선물 같은 생각이 들지를 않았습니다. 자연히 고맙다는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러자 서운했던지 남편이 뻔히 쳐다봅니다. 그제야 나는 실실 웃으면서 남편 말투로 말했습니다.

"어, 고마워!"
"무슨 말이 그래? "
"그니까 어, 선물! 하는 소리 좀 아끼라구요. 이쁜 얘가 빛 못 보잖아."


나는 마치 어린이가 자랑스러운 상장을 보이듯이 두 손으로 유즈어리를 바로 세워 보이며 활짝 웃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시무룩한 눈빛입니다. 소파로 가 앉더니 티비를 켭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외출복 그대로 티비를 켜는 것으로 보아 서운해도 보통 서운한 게 아닌 모양입니다.

유즈어리는 내 손에 딱 잡혀드는 크기입니다. 그리 두껍지도 않고 가볍고 예쁘고 가슴을 가로 질러 메고 다니는 내 작은 백에 넣고 다니기에도 알맞습니다. 남편이 마음먹고 골랐나 봅니다.

새해에도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작은 수첩을 이어 쓰려고 했습니다. 수첩을 절반도 못 썼기 때문입니다. 늘그막을 사는 주부라 그런지는 몰라도 주로 전화번호나 어쩌다 있는 약속 날짜를 기입하고 그 외에 김장한 날자와 비용 또 가스 중간밸브와 호수를 교체한 거라든지, 내 딴에는 굵직한 것들인 그런 것들만을 메모해 두기 때문에 아직 많이 남은 것입니다.

수첩을 사용하면 뭐든지 자유롭게 빈 공간이 없이 이어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어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한정된 칸입니다. 매일 매일 쓰지 않고 수첩 식으로 쓴다면 아마도 90%는 빈 칸 그대로 두게 될 것 같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궁 끼가 보이는 수첩보다는 겉표지가 근사한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이의 모습이 좋아 보일 때가 있기는 합니다. 지난 가을, 우리 성당 여자부회장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주보를 접던 날입니다. 부회장은 부회장 임기인 2년이 다 되어간다고 하면서 임기가 끝나기 전에 주보 접기 팀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한번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회장은 '어느 날이 비었을까, 주보 접는 날인 토요일이어야 하는데'하고 혼잣말을 하며 하얗고 고운 손으로 큰 가방에서 공책만한 두터운 다이어리를 꺼내 뒤적였습니다.

"아, 9월30일 어떠세요? 전 이 날 아무 약속 없어요."
'2주일 후잖아. 우리야 뭐.'


@BRI@연분홍 투피스를 입은 부회장은 우아한 모습으로 그 근사한 다이어리에다 메모를 했고, 나는 작은 수첩을 꺼내 메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은근히 비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느낌은 처음입니다.

아무튼 그 날짜에 우리 주보 팀은 주보 접기를 끝내고 나서 부회장과 같이 경기도 남양주 월문리 어디쯤 숲속에 묻혀 있는 근사한 음식점에서 보낸 승합차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나는 점심을 먹기 전에 수첩에 '9월30일 토. 부회장과 주보 팀 점심약속'이라고 한 메모에 실행완료 의미로 체크를 했습니다.

남편도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12월이면 수영을 다니고 있는 우리 동네 YMCA회관에서 꼭 수첩 모양 같이 생긴 다이어리를 받아 오는 것입니다. 남편의 다이어리는 한 칸도 비어 있지를 않습니다. 월간 난, 일기 난, 메모난까지 꽉 메워져 있습니다. 일기인지 메모인지 뭐가 뭔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좀스럽게 별별 걸 다 적어 놓기 때문입니다.

황태채 콩나물국 OK. 호접난 화분 깨짐. 치간 부러쉬 두 개째 부러짐. 장미아파트 구장에 가서 게이트볼. 국민생활 체육회에서 준 티셔츠 입고 게이트볼 회원들 단체사진 찍음. 군인공제회 빌딩에서 친구들과 13,000원 짜리 뷔페 먹음. 온가족 구충제 젠텔 복용. 1개 700원임. 해군동기 모임 밀린 회비 6만원 냄. 수바에서 노니 티 소포 도착.

내가 뭘 이런 소소한 걸 다 써놓느냐고 너무 지저분하다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다이어리를 감춰놓고 보여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소소한 것들이 소소한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심심할 때 들여다보면 얼마나 재밌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약해서 한마디로 써 놓았건 두세 줄로 길게 써 놓았건 간에 모두가 저마다의 또 다른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남편의 말에 나는 공감을 합니다. 나도 수첩에 적어놓은 김장한 날짜를 보면 대뜸 승용차를 가지고 남편과 같이 가락시장에 가서 배추를 샀던 일부터 김장을 담그기까지의 일들이 영화를 보듯이 떠올라 즐거워집니다. 그리고 행복을 느낍니다. 흔한 말로 예쁜 추억인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내 일상은 소소한 것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오늘의 할 일' 또는 '올해 할 일'하고 거창하게 계획 세우고 실행하고 하는 나이는 아주 오래 전에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 수첩에는 내 하루가 하나도 담겨 있지를 않습니다. 그냥 딱딱한 수첩일 뿐입니다. 남편의 다이어리는 잔정이 듬뿍 어린 소중한 추억 덩어리인 데 비해 내 수첩은 볼품없고 그지없이 삭막합니다.

새해에는 나도 유즈어리에 좀스럽게 별별 걸 다 기록을 해 봐? 속상한 일, 서운한 일, 즐거운 일, 이웃이 나누어 준 말린 도라지며 유난히 맛있게 먹은 청국장찌개 재료까지 모두 모두를 말야. 그래서 남편처럼 어느 날 들여다보고 재밌어하며 웃기도 하고 위로도 받고---. 가만, 아 바로 그거였나? 나는 주춤합니다. 유즈어리 선물도 고맙지만 내가 그러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유즈어리를 선물한 남편의 마음이 더 고마워집니다.

새해에는 그런 별별 걸 다 기록하는 일로 남편과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늘그막에 닭살 커플 못지않은 사이가 되면서 나름대로 하루하루가 좀 더 충실한 나날이 될 듯도 싶습니다.

남편은 왕복 시간이 만만찮은 안산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와서 그런지 몹시 피곤해 보입니다. 그런데다 여전히 서운함이 풀리지 않은 눈치입니다.

나는 얼른 유즈어리를 안방 컴퓨터 앞에 잘 모셔놓고는 주방으로 가서 커피포트에 물을 붓습니다. 보나마나 남편은 정성껏 맛있게 탄 커피 잔을 받아들자마자 씩 웃고 나올 것입니다. '어, 고마워!' 하면서.

이런 내 모습을 남편은 또 무슨 말로 다이어리에다 기록을 하려나. 다이어리를 보여주질 않으니 한참 훗날에나 알게 될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2006 나만의 특종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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