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군인이 되고자 스스로 지원한 여군들이지만 지내 오면서 언제나 더 힘들었던 것은 군인으로서 지켜야할 규칙이나 훈련보다는 '여성'이라는 인식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 삼인
여기 27년 동안 한 가지 직업에 열성을 바친 여성이 있다. '대한민국 여성 헬기 조종사 1호'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피우진 중령. 자신이 여성인 것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사회가 정해준 여성성과 그로 인한 남성중심사회에서의 차별은 거부한 그녀.

그녀는 여군 모집 공고를 보는 순간 '이게 내 길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군대이기에 남여 차별이 없을 거란 기대와는 달리 더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집단에서 회의를 느꼈지만 그런 회의를 에너지 삼아 기존의 부조리한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27년간 한 길만 달려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퇴역 통지서가 날아 왔다. 지금은 완치되긴 했지만 4년 전 걸린 유방암 때문이다. 뒤늦게 그 사실이 심신장애 2등급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신체검사 군 인사법 시행규칙에 따라 암 병력이 있거나 유방을 절제했을 경우 전역하도록 하는 규정하고 있다. 피 중령은 국방부 인사소청심사위원회에 전역 결정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지만 결국 강제전역 조치를 당하게 됐다.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인사법 규정을 비판하며 피우진 중령의 퇴진 조치를 재고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고 있다. 이렇게 그녀가 주목받게 된 것은 여군으로서 그녀가 밟아온 여정이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자극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피우진 지음, 삼인)는 피우진 중령 자신의 지난 30여 년간의 군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군대 내의 남성 중심의 문화에 대한 생생한 경험과 비판이 담겨 있어 사회 전반적인 새로운 자각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다.

@BRI@군대라서 남녀 차별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가 체험한 군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커트를 정복으로 입게 하고 화장을 명령하며 마치 미스코리아라도 양성하듯 우아함과 신비성을 요구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훈련이나 기타 화장실 사용, 목욕 등 일반 생활에서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이중적 시선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어릴 적부터 부조리한 것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은 군 생활에서 부딪치는 이런 성차별에 대해 반발하고 명령을 거부하게 했다.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스스로 치마폭과 눈물과 달콤한 초콜릿에만 감싸여 있기를 원하는 여군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알리고 '능력'으로 당당하게 평가받고 싶은 그녀의 바람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들게 하려고 여군을 불러 오라는 상급자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해 미움을 받기도 하고 그 때문에 보직 해임돼 옮겨 다니는 일도 잦았다. 또 군대 내의 여군 장교가 자신의 당번하사를 모 남자 장군에게 성상납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려고 피해자 하사를 설득했지만 그런 행동은 곧 군 생활을 끝내기를 각오하는 것과 같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계속 강요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적은 내부의 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같은 여군이 자신을 돕지 않고 나 몰라라 하거나 미워하기도 할 때는 더 힘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사방에 적을 만들면서까지 원칙을 지키고 부조리한 일에 일일이 나서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았다고.

하지만 스스로에게 지쳐갈 때마다 그녀를 지켜준 것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는 직접 도움을 받진 않더라도 좋은 군인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다른 부조리한 것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군인으로서 또 남들보다 힘든 길을 선택해서 걸어온 그녀는 '오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의지가 굳다. 그녀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은상의 <다시 우뚝 서 본다>는 시를 읊곤 한다.

아무리 지치단들 피야 어이 식을라고 /뒹굴어 상처 나도/ 털고 다시 일어나서/ 돋는 해 가슴에 안고/ 다시 우뚝 서 본다

유방암으로 판정받았을 당시, 다른 사람 같으면 여성의 상징인 가슴을 도려낸다는 충격에 휩싸여 있을 텐데 오히려 그녀는 군 생활을 해오면서 외형상으로나 실제 황동에서나 가슴이 너무나 불편했다며 양쪽 가슴을 다 절제해줄 것을 부탁했다. 여성으로서 특별한 배려도 차별도 없이 남군과 동일하게 근무하고 싶다는 소망에서였다.

암을 치료하는 동안에나 완치된 후에도 변함없이 열심히 일하며 체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매일 등산하며 자기 관리를 더욱 철저하게 했던 그녀. 병이 완치되고 3년 동안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새벽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근무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심신장애 2급 판정으로 공중 근무자 불합격 판정이었다. 그녀는 호소한다.

"군 생활은 제 삶의 전부입니다. 전역하라고 하는 것은 저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자꾸 그녀에게서 삶의 가장 중요한 걸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걸까? 열심히 살아온 그녀에게 암이라는 병을 준 하늘의 무심함일까 원리원칙을 지키려는 그녀의 대쪽 같은 올곧음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까

대한민국 여군들의 살아 있는 모범이 되고 싶다는 그녀. 현실의 불합리 속에서도 마음 편하고자 거기에 맞춰가는 것만 더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힘의 논리로 껍데기만 남은 계급의식과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불평등한 집단에 쓴소리 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은 가슴 벅차게 반갑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목숨을 바쳐도 좋을 만큼 자신의 일에 애착을 갖고 있는 그녀의 삶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책의 마지막 구절이 앞으로의 그녀 행적을 대신 말해준다.

"오로지 앞으로 전진한다"

덧붙이는 글 |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우진 지음. 삼인 출판사 9000원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 개정판

피우진 지음, 삼인(2017)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