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모방범>
<모방범> ⓒ 문학동네
일본의 추리소설에는 사회추리소설이라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 오랜 시간동안 무수한 일본의 작가들이 이런 사회추리소설을 발표해왔다. 때문에 사회추리소설이란 장르는 현대 추리소설의 한 흐름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회추리소설의 특징은 트릭이나 구성 또는 반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추리라는 형식 속에서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독자에게 호소하는 경향이 강하다. 추리의 형식을 빌린 사회소설 혹은 사회문제를 소재로한 추리소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회추리소설, 일본서 왜 인기?

보통 사회추리소설의 효시는 마쓰모토 세이초로 꼽는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요코야마 히데오 등의 작가들이 대표적인 사회추리소설 작가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사회추리소설이 유독 일본에서만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얼까?

사회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경력을 보면 꽤나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등단 전에 다양한 영역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해왔다는 점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했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기공학을 전공하고나서 엔지니어 생활을 했다. 그리고 요코야마 히데오는 신문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방향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기시 유스케는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런 평범했던 이력이 이들의 작품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BRI@그리고 이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작품 속에서 직장생활을 통해서 얻었을 경험과 지식을 방대하게 풀어놓는다. 미야베 미유키는 <화차>에서 신용불량과 개인파산제도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고, 요코야마 히데오는 <사라진 이틀>에서 특종을 둘러싼 기자의 내면과 신문사의 내부 분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엔지니어 답게 <레몬> <변신>에서 첨단의학을 하나의 소재로 하고 있고, 기시 유스케는 <검은 집>에서 보험금 때문에 벌어지는 보험사와 고객간의 갈등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파 추리작가들이 다양한 영역을 무대로 해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이런 사회생활의 경력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사회파가 아닌 본격파에 가까운 추리작가들은 이런 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비교적 본격파 추리작가에 속하는 유키토 아야츠지, 아카가와 지로가 그런 경우다.

그리고 텐도 아라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회파 추리작가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조리한 제도와 모순을 느꼈을테고,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범죄로 치닫는 인간의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잘 알고있는 세계의 모습을 추리의 형태로 만들다보니 '사회추리소설'이 만들어진 것 아닐까?

물론 사회추리소설의 배경에는 좀더 복잡한 사정이 있을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사회추리소설이란 것은 영미권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회문제와 추리를 결합한 이런 장르야말로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일 것이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이 말한 것 처럼 '부르주아 사회야말로 범죄사회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일본 사회추리소설의 대표작가, 미야베 미유키

<이유>
<이유> ⓒ 청어람미디어
1960년에 태어난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추리소설의 대표작가이자 현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일본 문단의 온갖 상이란 상은 전부 받고있는 인물이다.

한 월간지에서 선정하는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작가'에서 7년 연속 1위를 한 작가이자,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했던 경력 때문인지 대표작인 <화차> <이유>에서 법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92년작 <화차>에서는 신용카드 때문에 발생하는 개인파산제도를, 98년작 <이유>에서는 부동산 경매제도와 '버티기 꾼'에 관한 법률지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 작가의 대표작에서 반복되는 배경은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당시에 이런 문제 때문에 고통받던 개인들을 보아왔던 것일까?

미야베 미유키가 넘나드는 장르 또한 대단하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유>에서 추리소설의 전통적인 화법이 아닌 일종의 '보도 문학' 형태를 선보인다. <브레이브 스토리>에서는 판타지의 세계를 그리고있고, 게임 마니아답게 게임을 소설화한 < ICO-안개의 성 >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대단한 필력의 작가이다.

<이유> <화차>는 이런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적인 사회추리소설이다. <화차>에서는 무절제한 신용카드의 사용으로 인해서, <이유>에서는 호화로운 아파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어쩔수없이 범죄에 말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있다. 꽤 두꺼운 분량의 소설이지만 단숨에 읽힌다. 미야베 미유키가 묘사하는 인물이 생생하고, 그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이 너무도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유> <화차>에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고질적인(?) 단점인 정교한 추리의 부족이 엿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작품의 분위기와 인물들을 이끌고가는 솜씨는 그런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 그리고 과연 '추리의 부족'이란 것이 단점일까?

일본에서 사회추리소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그만큼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의미일수도 있다. '추리의 부족'이 단점이라 하더라도, 그 단점을 장점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일수 있다. <화차>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2001년, 미야베 미유키는 자신의 최고작이자 일본 추리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 <모방범>을 발표한다.

범죄와 추리, 인간의 장대한 로망 <모방범>

<모방범>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원고지 6000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비롯해서 6개 상을 휩쓴 작품, 게다가 일본에서 300 만부 가까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이자 일본의 한 소설가의 평처럼 '출판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공원의 한 쓰레기통에서 여자의 절단된 오른팔과 핸드백이 발견된다. 이 발견을 시작으로 일본인의 관심을 사로잡는 연쇄납치와 살인이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범인이 누구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흥미로운 부분은 연쇄살인이 피해자의 가족과 그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다.

<모방범>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연쇄살인의 피해자와 범인, 그 가족,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와 그것을 기사화하려는 저널리스트까지. 이 인물들은 서로 얽혀서 대화하고 싸우고 상처를 주면서 커다란 이야기를 형성한다.

이들은 살인이라는 사건을 간접적으로 겪으면서 황폐해지기도 하고 단단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질문한다. 범인은 별다른 동기도 없이 왜 이런 연쇄살인을 하는걸까?

<모방범>에는 이렇다할 트릭도 없다. 굳이 트릭을 꼽자면 '모방범'이라는 제목 자체가 하나의 트릭이다. 이 제목의 의미가 밝혀지는 마지막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장면은 주요등장인물인 여성 저널리스트가 가장 밝게 빛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미야베 미유키는 자신을 투영한듯한 이 저널리스트를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사건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다른 등장인물의 내면에 대해서 그리고 동기없이 범죄를 행하는 범인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온갖 상처와 좌절 속에서도 꿋꿋하게 글을 써나가는 저널리스트에게 어느날 한 동료가 이런 말을 툭 던진다.

"인간이란 모두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살아."

닮고 싶은 누군가를 흉내 내고, 범죄를 흉내 내고, 정신분석을 흉내 내는 것처럼 인간들은 전부 무엇인가를 모방해서 살아가는지 모른다. 좀더 큰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집단이나 이 사회도 다른 사회를 흉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점점 삭막하고 끔찍해지는 범죄 조차도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범죄에 둔감한 것처럼 애써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날 운이 좋아서 미야베 미유키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나요?"

덧붙이는 글 | <모방범>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양억관 옮김. 문학동네 펴냄.


모방범 1 - 개정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문학동네(201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