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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정해(丁亥)년이다. 돼지 해(亥)에서 연상되는 일차적인 이미지는 풍요다. 몽골인들에게는 정해년이 칭기즈칸이 출생(1167년)한 해인 동시에 사망(1227년)한 해이기도 하다. 그럼, 우리 역사 속의 정해년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었을까? 실제로 과거의 정해년에는 어떤 사건들이 있었을까?
지난 2004년에 레이황이 저술한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있다. 명나라 만력 15년 즉 서기 1587년도 올해와 같은 정해년이었다. 그 책의 제목처럼, 우리 역사 속에서 정해년은 비교적 '아무 일도 없었던 해'였다. 물론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는 없었겠지만, 역사가들의 기준으로 볼 때에 정해년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해년에 중요 사건이 하나도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정해년에 발생한 주요 사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747년 : 고선지(高仙芝, ?~755년) 장군, 사라센제국의 동방 진출 저지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 장군으로 활약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747년 정해년에 고구려 출신 고선지는 당나라 장군으로서 역사적인 공적을 세웠다. 이 해에 중국 서쪽의 토번(吐蕃, 티베트)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체결하고 동쪽의 당나라를 견제하였다.
이를 기회로 사라센제국이 동진(東進)을 도모하자, 행영절도사가 된 고선지는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고원을 넘었다. 그는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사라센제국의 동방 진출을 차단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당나라의 패권 유지에 기여한 것 자체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선지의 대활약은 고구려인들의 개인적 역량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107년 : 윤관, 여진 정벌
종래에 고려의 책봉을 받던 여진족이 11세기 후반부터 점차 세력이 강해졌다. 1097년 완안부족연맹의 영가(盈歌)가 동번여진을 통일하고 두만강 이남과 천리장성 이북을 침략하였다. 이에 고려는 종래의 온건책을 폐기하고 적극적인 토벌전쟁에 나섰다. 정해년인 1107년에 윤관이 이끄는 17만 대군이 여진족 촌락 135개를 함락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해인 1108년에 고려는 아골타가 이끄는 완안부족연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여진족은 "대대손손 고려에 조공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이 약속을 받은 고려는 1109년에 동북 9성을 반환하였다.
1107년에 동북 9성을 확보함으로써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에 일단 성공하긴 했지만, 그것이 불완전한 것이었기에 고려는 그 다음 해에 동북 9성을 도로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대외정책과 군사력이 2% 부족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887년 : 영국군, 거문도 철수
19세기 국제정치의 양대 산맥은 영국과 러시아였다. 19세기는 발칸반도·중앙아시아·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세계적 규모의 패권 대결을 벌이던 시기였다. 러시아는 1884년부터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선측이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인 데에서 생긴 일이었다.
조선과 러시아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1884년)한 데 이어 갑신정변(1884년) 이후에는 조선-러시아 밀약설까지 유포되자, 1885년에 영국의 동양함대는 "러시아의 남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핑계로 조선 남쪽의 거문도를 무력 점령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해군이 철수를 단행한 해가 바로 1887년 정해년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측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과 청나라 주재 러시아대리공사 레디겐스키의 1886년 텐진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이 협약에서 청나라 측은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할 수 있도록 중재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러시아측은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같은 열강의 상호 타협 속에서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물러간 것이다.
@BRI@이상의 3가지 사건을 제외하면, 역사 속의 정해년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역사가들의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해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그만큼 '살기 좋은 해'였는지도 모르겠다.
정해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놓고 특징을 추출하기에는 샘플이 너무 적긴 하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3가지 사건의 공통적 이미지는 '외부의 위협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고선지의 경우에는 비록 당나라를 위해 싸우기는 했지만, 그의 역할로 인해 서쪽 사라센제국의 위협이 감소하였다. 그리고 윤관의 여진족 정벌로 인해 동북 변경의 위협이 감소되었다. 또한 영국군의 거문도 철수로 인해 영국은 물론 러시아까지 한반도에서 한걸음을 떼게 되었다.
위와 같이 전반적으로 볼 때, 정해년은 우리 민족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주는 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한 가지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고선지가 비록 큰 일을 해냈다고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망국의 유민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윤관이 동북 9성을 축조했지만, 상승일로에 있던 여진족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9성을 돌려주고 말았다.
또 영국군의 거문도 철수로 인해 조선 주변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열강의 타협에 의해 벌어진 일이며 또한 영국·러시아의 후퇴로 인해 7년 뒤의 청일전쟁 때에 일본을 견제할 만한 외교적 카드가 사라지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사례에서 특징을 추출한다는 것 자체에 일정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 속의 정해년은 우리 민족을 둘러싼 위협을 감소시켜 준 행운의 해인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역량을 강화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의지대로 될 수는 없다는 교훈을 던져준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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