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조 약속의 의도가 수나라를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고구려가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리는 만무하였다. 그래도 수양제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 보았다. 또 입조 약속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는 외교적 카드의 의미도 띠고 있었다. 본국에 돌아온 수양제는 "왜 입조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고구려에게 독촉장을 보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표현에 따르면 "(영왕)왕은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고 적고 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수양제가 제4차 침공을 계획했지만, 그것마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다음으로, 고려-요나라 시대의 사례가 있다. 요나라는 제1차 고려 침공(993년)에서 고려의 조공을 받기로 하는 대신 고려에게 압록강 동안(東岸) 280리(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한 후에 철군한 바 있다. 그런데 고려와 북송이 비밀리에 접촉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한 요나라는 1010년에 강조(康兆)의 정변을 빌미로 제2차 고려 침공을 단행하였다.
이때 고려 현종은 "조만간 입조하겠노라"며 요나라 군대를 돌려보냈다. 요나라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입조 약속을 받은 것을 명분으로 삼아 철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는 고려-북송-요나라 3자 정립시대였으므로, 요나라는 고려에 대해서만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던 것이다.
수양제처럼 요나라 성종(聖宗)도 이 입조 약속에 기대를 거는 한편, 입조 약속을 무기로 고려를 압박하였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고려를 채근한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분노한 요나라가 1018년에 제3차 고려 침공을 단행했지만, 유명한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요나라 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는 입조 대신 입수(入水)라는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한족이나 거란족 출신의 중국 왕조들은 한민족 군주의 입조 약속에 번번이 속고 말았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알고도 속아 넘어가 준 측면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한민족이 끝내 속이지 못한 민족이 하나 있다. 바로 몽골(원나라)이다. 이 경우에는 몽골이 한민족의 친조 약속에 대해 ‘강제집행’을 결국 단행했고, 한민족도 할 수 없이 채무를 갚고 말았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232년 강화도 천도 이후 상호 대결에 들어간 고려와 몽골은 1260년에 강화(講和)를 체결함으로써 오랜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부터 몽골은 고려에게 끊임없이 입조를 요구했고, 그 요구를 못 이긴 고려 원종은 1264년에 드디어 입조를 실행하게 되었다.
이때의 입조는 한민족 왕조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한족도 받지 못한 한민족 군주의 입조를 몽골 출신 원나라가 유일하게 받은 것이다.
위와 같이, 한민족 왕조가 중국측에게 입조 약속을 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지만, 몽골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것은 사실상의 휴전 제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고려 원종이 몽골에 대해 입조한 경우를 빼면, 한민족의 군주가 중국 수도에 가서 중국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중국의 주류인 한족 왕조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입조를 한 적이 없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중국 입장에서는 한민족의 입조 약속이 대체로 ‘신용등급 제로’의 허언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대 중국 왕조들이 사대의 형식을 갖추는 한민족 군주들을 끊임없이 의심한 이유 중 한 가지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한민족은 ‘믿을 수 없는 족속’인 동시에, 그렇다고 마음대로 침략할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중국이 그 ‘믿을 수 없는 족속’을 끝내 정복하지 못한 것은, 한민족 역시 무시하지 못할 역량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에 대한 입조를 제외하고 한민족 군주들이 단 한번도 중국 왕조에 대해 입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은, 한·중 간의 사대관계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가 될 것이다.
사대주의가 가장 심했던 조선시대에조차 조선 군주들은 중국 군주를 직접 알현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중관계가 서양식의 종속관계가 아니라 동아시아 나름의 상호 자율적인 관계였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