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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식 선생님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림을 잘 그려주었습니다. 우리 아들을 그려 준 그림입니다.
신영식 선생님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림을 잘 그려주었습니다. 우리 아들을 그려 준 그림입니다. ⓒ 이승숙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한 여성 개그맨이 결국 다시 못 올 길을 떠났다. 함께 했던 친구들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며 눈물을 쏟았다. 그 모습을 보니 작년 이맘 때 떠나보낸 신영식 선생님이 생각났다.

신영식 선생, '돌배'와 '짱뚱이'를 이 세상에 내보낸 만화가 신영식 선생을 알게 된 건 참으로 우연이었다.

나는 '녹색연합이 발행하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월간지를 사랑하는 읽새(독자)였다. 그 월간지에는 '짱뚱이의 옛날 이야기'란 꼭지의 만화가 실렸는데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손꼽아 기다리는 인기 만화였다.

나는 그 만화를 보면서 짱뚱이란 별명을 가진 이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짱뚱이를 우리 앞에 데리고 온 만화가 신영식 선생도 어떤 이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짱뚱이'를 그린 '신영식' 선생을 만난 건 필연이었다

어느 봄날 오후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흔들림도 정지한 듯한 나른한 오후였다. 우리 집 고양이 '꼬비'는 햇살이 머물고 있는 작은 방 앞 툇마루에 온 몸을 길게 누이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한낮의 그 고요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BRI@전화가 울렸다. '꼬비'가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길게 기지개를 켜며 온 몸을 활처럼 쫙 폈다. 나는 느릿느릿 걸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선 저 너머에서 정감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이승숙 님이시죠? 저는 오진희입니다."

짱뚱이의 실제 모델인 오진희씨가 전화를 한 거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반기며 전화선 안으로 뛰어들 듯 말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영식 선생과 오진희씨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봄날의 오후와 저녁을 보내고 그들 부부는 돌아갔다.

강화에서 돌아간 다음 날 신영식 선생은 병이 났다. '강화'에 가고 싶은 병이 나서 자나 깨나 강화 이야기만 한다고 했다. 신영식 선생의 바람에 못 이겨서 아내인 오진희씨는 도시 살림을 접고 강화로 이사를 왔다.

신영식 선생은 아주 섬세하고 고운 사람이었다. 모시 결처럼 마음이 깨끗하고 고왔다. 그 결 고운 마음으로 조용조용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남편과 신 선생은 서로 마음 줄이 닿아 있었다. 남편은 진정으로 신 선생을 존경했고 좋아했다. 신 선생 역시 우리 남편을 그리 대했다. 둘은 서로를 은은하게 생각했다.

우리 부부와 신 선생님이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들, 그 순간들이 생각난다. 어느 밤, 이야기에 젖고 음악에 젖어서 눈물을 흘렸던 그 밤도 생각난다.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이승숙씨는 참 아름습니다"라고 했던 그 말도 생각난다. 사람을 보면 좋은 면, 아름다운 면을 보고 더 키워주셨던 신영식 선생님, 그러나 우리 부부와 신영식 선생과의 인연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름다운 마음을 봐 주셨던 신 선생님

2005년 7월 27일, '한강 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에서 옷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2005년 7월 27일, '한강 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에서 옷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 이승숙
2004년 가을에 신 선생님이 아프다는 연락이 왔다. '식도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다고 했다. 신 선생은 화학요법을 멀리 하고 자연 치유력을 택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과 사회에 치이고 부대끼느라 보살피지 못했던 자신의 몸을 다시 돌아봤다. 자신을 용서하고 몸을 사랑하며 섭생을 통해서 병을 고쳐갔다.

2005년 12월 어느 날 밤이었다. 오진희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 선생님이 많이 안 좋아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기에 전화했습니다."

우리는 그 길로 뛰어갔다. 신 선생은 마치 성자 같았다. 온 몸에 살이 하나도 없는 바짝 마른 몸이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처음 봤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신 선생은 좀 특별했다. 모든 것을 다 비우고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어 보였다. 뼈밖에 없는 몸에 기다랗게 자란 수염과 머리카락, 신 선생은 자신이 믿고 또 따랐던 예수님의 모습과 같았다.

병문안 온 사람들은 오히려 신 선생님에게서 위안과 평온을 얻어갔다. 신 선생은 성자와도 같이 사람들의 깊은 고민과 근심들을 들어주었다. 신 선생에게서는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몇 달을 물밖에 못 마셨던 신 선생은 몸과 마음의 독소들을 다 비워내고 성자가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과 평화를 심어주었던 신영식 선생님

2006년 1월 17일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신 선생의 아내인 오진희씨였다.

"조금 전에 신 선생님이 운명하셨습니다. 영준이 아버님께는 알려 드려야 될 거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신 선생님은 아주 평화롭게 가셨다고 했다. 더 이상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평화롭게 가셨다고 했다.

신 선생님이 가셨다는 연락을 받고도 나는 그 다음 날 바로 문상을 가지 못했다. 나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 이웃의 왕언니들이 하루 나들이를 하는데 내가 운전사 노릇을 해주기로 미리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그 다음 날 여행을 떠나야 했다.

아전인수 격일지 몰라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신 선생님은 분명 나를 예쁘게 봐 주실 거야. 내가 언니들과 약속을 깨고 문상 가는 거보다 언니들을 위해서 하루 운전수 노릇 하는 걸 더 예쁘게 봐 주실 거야.'

신 선생님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주실 분이었다. 틀림없이 내게 "영준이 엄마, 잘 했어요"라고 그러실 분이었다.

하얀 면옷에 그려준 기념 그림.
하얀 면옷에 그려준 기념 그림. ⓒ 이승숙
신 선생님이 돌아가신 그 다음날 언니들이랑 간월도로 여행을 갔다. 차가 없는 언니들을 위해서 종일 기사 노릇을 했다. 웃고 떠들고 춤추며 하루 종일 놀았다. 내 마음 속에는 신 선생이 분명 나를 예쁘게 봐 주실 거란 믿음이 있었다.

신 선생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었다. 말로는 잘 표현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신 선생님은 남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로 기억되었다.

2006년 1월 19일, 조금 쌀쌀했던 그 날 아침의 평화롭던 장례예식이 생각난다. 사랑이 조용히 넘쳐흘러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었던 장례예식이었다.

신 선생님은 잘 계시고 있겠지. 신 선생 가시자 너무 허망해 하던 영준이 아빠, 그래서 두 번 다시 신 선생 집 근처에 가지 않는 영준이 아빠 마음을 다 아시겠지.

신 선생님, 선생님이 좋아했던 우리 집은 여전합니다. 가끔씩 낮에 들러서 아무도 없는 빈 집을 둘러보고 가셨다고 했지요? 삽살개 갑비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뜨락(뜰의 북한말)에 앉아서 쉬었다 가셨다 그랬지요.

요즘도 가끔씩 우리 집 둘러보러 오십니까? '갑비'가 새끼 낳은 것도 아시겠네요. 효은이랑 영준이가 저렇게 잘 큰 것도 보셨겠지요? 신 선생님이 가시자 마치 형을 잃은 듯, 아버지를 잃은 듯, 그리고 따랐던 선생님을 잃은 것 같다 하던 영준이 아빠의 마음도 다 이시겠지요?

우리 집을 사랑해 주셨고 우리 부부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해 주셨던 신영식 선생님, 신 선생님이랑 함께 했던 순간들을 우리는 영원히 못 잊을 거예요. 그렇게 많은 순간들을 함께 했지만 우리는 사진 하나도 같이 찍은 게 없네요. 신 선생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만 남아 있네요.

신 선생님, 잘 계시지요? 우리 부부도 잘 지낸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우리가 신 선생님 근처에 가게 되면 그때 또 우리 뭉쳐요. 벽난로에 불 때서 고구마도 구워 먹고 차도 나눠 마시며 조근 조근 이야기 나누어요. 신 선생님,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덧붙이는 글 | 신영식 선생님은 오랫동안 환경운동을 펼쳐 왔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짱뚱이 시리즈', '하나뿐인 지구', '초록이네'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교육, 홍보 만화를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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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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