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저널> 기자들이 지난 5일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7월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이윤삼 <시사저널> 편집국장의 사표를 수리했고, 그 뒤 6개월 동안 사측과 기자들은 공방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기자들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짝퉁' <시사저널>이 만들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황상익 기자는 서울대 의대 교수다. <편집자주>
|
20년쯤 전 외국 여행 중 본 텔레비전 영화라서 배우와 감독의 이름은 물론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만은 아직도 뚜렷하다.
영국의 어느 자동차 생산공장에서 벌어진 파업에 관한 이야기인데,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외지의 실업자가 파업 노동자들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병마로 고생하는 아이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잘못인 줄 알면서 파업 파괴 행위에 가담한 그 실업자의 인간적 고뇌가 잘 그려진 영화였다.
'대체인력 금지'는 상식... 언론인들은 모르나?
@BRI@현대국가라면 당연히 '정당한 쟁의기간에 기존 업무를 대체하는 인력을 투입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다. 노동 보호 측면에서는 끝자리에서 헤아려 보는 것이 훨씬 빠를 만큼 후진국인 우리 대한민국도 대체인력 투입을 노동법(제43조)으로 금지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이미 법률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상식이다. 법률 조항을 잘 알 것 같지 않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 가책을 느낄 만큼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이번 '짝퉁 <시사저널>' 사태를 보면서 내가 특히 어리둥절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구체적인 법률 문구는 모른다손 치더라도 정당한 파업에 대체인력으로 가담한다는 것이 법률과 상식에 어긋난다는 점을 모를 리 없는 '언론인'들이, 그것도 '중견' '중진'을 자처하는 언론인들이 대거 그러한 행위를 벌인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영화 속 주인공만큼이나 기막힌 곤경에 처해있는 것인지. 또 그러한 인간적 고심의 결과인지.
영화에 나온 대체인력은 파업 노동자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대체인력으로 동원된 '비상근 편집위원'들은 면식이 있는 없든 파업에 나선 <시사저널> 기자들의 언론 '동료'이고 '선배'들이 아닌가? 어째서 동료, 후배 기자들이 파업에 나서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더 더욱 이 분들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약효는 없고 부작용만 가득한 '짝퉁'
어떤 언론이든 논조와 격조라는 것이 있다. <시사저널>도 900호를 이어오면서 나름의 논조와 격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잡지를 제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독자들도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 '짝퉁 <시사저널>'은 그 동안의 논조를 180도 바꿔놓았고 격조를 바닥에 처박았다. 독자들을 철저히 배신한 것이다.
약효는 전혀 없고 부작용만 가득한 약에 비유해야 할까? 아니면,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에 견주어야 할까?
잡지가 아닌 다른 상품의 경우라도, 구매자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상품을 만들어 판다면 구매자들에게 배척받을 뿐만 아니라 지탄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그 동안의 제작자들이 아니라 대체인력들이 그랬다면 얼마만큼 가혹한 비판과 비난을 쏟아부어야 할지, 나는 내 빈곤한 어휘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의도는 대체인력으로 동원된 실업자의 처지와 고뇌를 통해 사용자의 용렬함과 잔인함을 고발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황당하게도 <시사저널>의 역사를 배신하는 대체인력으로 내몰린 '비상근 편집위원'들이 영화 <파업전야(1990년)>의 '한수'가 되어 자신들과 <시사저널> 살리기에 나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한낱 철없는 로맨티스트의 백일몽일까?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