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저널> 기자들이 지난 5일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7월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이윤삼 <시사저널> 편집국장의 사표를 수리했고, 그 뒤 6개월 동안 사측과 기자들은 공방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기자들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짝퉁' <시사저널>이 만들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김상익 기자는 전 <시사저널> 편집장이다. <편집자주>
|
나는 '짝퉁 <시사저널>'에 대한 첫번째 릴레이 기고문에서 '복사용지 사오는 편집장'으로 잠깐 등장한다. 필자인 서명숙은 그 장면이 꽤나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지만, 나는 1998년 3월의 꽹과리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당시에는 최원영 회장이 경영하던 모든 기업이 파산하고 <시사저널>을 제외한 다른 잡지, 그러니까 TV저널과 객석 등이 문을 닫았다. 잡지 폐간으로 하루아침에 퇴직금도 없이 길거리로 나앉게 된 자매지 식구들은 건물 복도를 오르내리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꽹과리 소리는 '너만 살자고 편하게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는 질타처럼 귀청을 때렸다. 꽹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그들과 마주칠 것이 두려워 화장실에도 가지 못했다.
<시사저널>의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차츰 후배 기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내게 찾아와 "우리도 제작 거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 나는 편집부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9년 전,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시사저널> 발행
@BRI@내가 굳이 9년 전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때의 내 답변과 지금 '짝퉁 <시사저널>'을 만들어내고 있는 회사 측의 논리가 겉으로는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결호 없이 계속 나와야 한다. 주간 잡지가 한 주를 거르는 것은 독자를 배반하는 행위이며, 정상적인 발행이 중단되는 순간 <시사저널>은 사망 선고를 받게 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현재 시사저널 편집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금창태 사장이 같은 논리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9년 전 우리는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일 자체가 고통이었다. 나부터가 손을 놓고 싶었다. 그것이 차라리 편한 길이었다. 아직 젊으니까 호구지책이야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시사저널>이라는 매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나하고 결혼한 거야? <시사저널>하고 결혼한 거야?" 아내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일에 빠져지냈던 10년 세월이 흔적도 없이 뭉텅 지워져버릴 판이니, 오기로라도 <시사저널>을 지켜내야 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 시사저널은 숱한 곡절을 헤치며 지금의 오너인 심상기 회장에게 인수되었다. 그 과정이 길고도 험했던 것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시사저널>이라는 제호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셈법 때문이었다.
가격 협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우리가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은 TV저널 등 폐간된 잡지의 기자들을 포함한 직원들의 퇴직금이었다. 오기로 버틴 끝에 우리는 <시사저널>도 살리고 꽹과리 소리에 빚진 부채도 갚을 수 있었다. 내가 시사저널의 '결호 없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짝퉁 <시사저널>'의 계속 발행은 시사저널과 그 식구들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넣는 길이다. 내가 한 입으로 9년 전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사실은 나는 일관되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제는 과거 그 어느 <시사저널>보다도 유명해진 <시사저널 899호>는 나와 선후배 동료들이 지켜온 그 <시사저널>이 아니다. 전국 수만 명의 독자가 매주 3000원을 기꺼이 지불하며 구독하는 그 <시사저널>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결호 없음'이 오히려 수치스럽다.
지금 발행되는 <시사저널>은 그 <시사저널>이 아니다
내 주변에는 기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짝퉁 <시사저널>에 불쾌감을 나타내면서도 결국은 파업을 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사태를 맞은 것 아니냐며 '기자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 자신도 지난 연말 후배들이 조심스럽게 파업 이야기를 들먹일 때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6개월 전 삼성 기사 삭제 사건이 났을 때 나는 이미 <시사저널>을 떠나 있는 바깥사람이어서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금창태 사장과 편집국 기자들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응원했다. 지금 생각하니 시사저널에 대한 애정과 미련이 그처럼 헛된 기대와 낙관을 품게 한 모양이다.
나는 금창태 사장과는 기자로서 함께 일해본 적이 없다. 그는 내가 2년 남짓 미국에 가있는 동안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따금 국제전화를 걸어 편집국 사정을 듣자하니 편집국 간부들과 금창태 사장 사이에 대화가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그러려니 했다. 사장과 편집장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는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가 좀 지나친 듯했지만 금창태 사장과 직접 부딪힌 적이 없기에 나는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시사저널 899호>를 받아든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 시사저널은 금창태 사장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정말이지 순진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나는 그의 정치적 성향과 언론관과 문화적 취향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하게도 <시사저널>과 전혀 '코드'가 맞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 독단적인 기준으로 <시사저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조선일보인 이유, <중앙일보>가 <중앙일보>인 이유, <한겨레>가 <한겨레>인 이유가 있듯이 <시사저널>이 <시사저널>인 이유가 따로 있다. <시사저널>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10년 넘게 정기 구독을 하고, 가판대에서 다른 주간지는 거들떠보지 않은 채 "<시사저널> 주세요"라고 외치는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금창태 사장, 그동안 마음고생 컸겠다
어려웠던 시절 동료 기자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는 바람에 지면 메우기가 힘들어 볼품없고 빈약한 잡지를 발행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시사저널>은 편집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지금 금창태 사장이 누리고 있는 '<시사저널> 편집권'은 9년 전 편집인이 부재한 상황에서 기자들이 온 몸을 던져 지켜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난 주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언론인 김선주는 "편집권은 오롯이 기자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발행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것은 함께 가는 것이고 총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고 썼다. 편집권과 관련해서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나 금창태 사장은 '편집권은 편집인의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시사저널 899호>를 만들어냈다.
방금 전 '짝퉁 2호'를 받아보았다. '지령 900호 기념호'라서 부피감이 느껴진다. 899호에 비해 편집 전략과 전술 면에서도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짝퉁'은 진품과 구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야 제대로 된 짝퉁이다. 그런 면에서 시사저널 900호는 '짝퉁의 명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899호에서 자기 정체성을 낱낱이 고백했으니 말이다. 변심한 <시사저널>은 독자가 안심하기를 기다려 머지않아 본심을 드러낼 것이다(사실은 900호 역시 그 본심을 감추고 있지는 않다).
이런 맥락에서 시사저널이 파업에 이르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피할 수 없는 결과였는지 모른다. 금창태 사장이 지난 3년 동안 세계관이 전혀 다른 매체에서 사장직을 수행하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기자는 기자대로, 사장은 사장대로 서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동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기에 결국은 기자들의 파업과 '짝퉁 <시사저널>' 발행이라는 지금의 사태에 이른 것이 아닐까 한다(발행인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나는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1998년의 '원고 인질극', 2007년 '매체 자작납치극'
9년 전에 겪었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겠다.
내부 동요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한 달 넘게 <시사저널>을 발행하던 1998년 4월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월요일 자정을 넘겨 최종 마감을 하고 마지막 교정 필름을 기다리고 있는데 충무로 출력소에 나가 있던 제작 담당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출력소 사장이 우리의 데이터를 몽땅 가지고 잠적했다는 것이었다.
하청 거래라는 것은 '3개월 뒤 어음결제' 하는 식으로 외상을 깔아놓게 마련이다. 그런데 모기업이 부도가 났으니 돈을 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력소 사장은 <시사저널> 원고를 인질로 잡아 협상을 벌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날 밤의 활극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다행히 회사 컴퓨터에 텍스트가 남아있으므로 사진만 확보된다면 새로 원고를 만들 수 있었다. 새벽 3시에 사진부 백승기(이번 사태로 가장 큰 징계를 받고 있는 그 백승기이다)를 호출해 사진을 갈아끼우고 사진 설명을 새로 달아 간신히 마감을 한 뒤 원고를 들고 충무로로 달려갔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어(아니, 정확히는 너무 이른 새벽이었다) 문을 연 출력소가 없었다. 제작 담당이 여기저기 전화를 건 끝에 한 출력소와 겨우 연결이 되었다. 밤을 꼬박 밝히며 작업을 마치고 원고를 인쇄소에 넘긴 때가 오전 11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도 시대의 최대 위기였던 이 '원고 인질극'을 계기로 기자들은 다시금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나는 자꾸만 9년 전의 '원고 인질극'이 생각난다. <시사저널> 기자들의 기사가 실종된 <시사저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자식이 유괴범에게 납치당한 것 같은 상실감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상황이 참으로 묘하다. 내가 알고 있는 <시사저널>이 '실종'된 것은 분명한데, 발행 겸 편집인인 금창태 사장이 '짝퉁 <시사저널>'을 계속 발행하고 있으니 '유괴 납치'는 아닌 것이다(그렇다면 혹시 자작 납치극?).
아무튼 어려운 시절에도 결호를 내지 않고 회사를 지켜온 기자들이 <시사저널> 편집국에는 많이 남아 있다. 나중에 들어온 후배들도 그러한 전통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 그들이 '짝퉁 발행'의 불명예를 감수하고 파업을 벌이고 있다. 독자의 알 권리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이번 사태가 종결되면 <시사저널> 기자들은 크게 사죄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취재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독자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더 좋은 기사를 써주기 바랄 뿐이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