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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정신
"망할 망할 제기랄! 가르쳐줘! 왜 나야? 왜 내 목숨으로 저 영혼들을 구제해야 해? 억울해! 가르쳐줘, 빌어먹을! 알아낼 거야, 알아내고야 말 거야......!"
(...)우리는 멋들어지게 예를 표했다. 한편, 내 안에서는 잊혀져 있던 어떤 울분이, 아직 막연하긴 했지만 불신감과 회의감으로 이미 짙어져가고 있는 울분이 꿈틀대고 있었다. 흔히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느끼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흔히 그토록이나 미치게 되고 마는 반발심의 시초였다. (P.170~171 <죄악의 구렁> 中)


그 이후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최근에 마르셀 에메(1902~1967)의 단편집 <파리의 포도주>를 읽고 책장을 덮은 뒤 엉엉 울다가, 갑자기 그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단편선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한 <파리의 포도주>에는 포도주를 너무 사랑했는데 가난으로 마실 수 없게 되자 미쳐버린 나머지 장인을 살해한 주인공이 나온다. 50년도 전의 프랑스를 무대로 하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지인의 후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공통점이란 세상의 '구제불능' 이야기를 뭐라 덧붙일 표현도 없이 빼곡하니 전하고 있었다는 점뿐이었다.

전쟁 후의 가난과 위선, 빵 한 조각을 벌기 위한 사기꾼 생활의 숭고함, 오르골 소리 하나를 위해 일가를 살해한 백치같은 범죄자. 고전의 조건일 법한 사회의 온갖 추악한 면을 빠짐없이 짚어가는 <파리의 포도주>는 내 '머리가죽의 피를 마르게(랭보)'하는 책이었다. 한 편 한 편이 모두 농밀하게 쟁여져 '머리가죽'을 알싸하게 만들지만, 그 중 '당통'이라는 살인자의 이야기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불가해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줄거리를 잠깐 실어볼까 한다.

오르골 소리를 듣고 싶어서 창밖에서 그 소리를 훔쳐 듣던 범인은, 일가가 창문을 잠그자, 일가를 살해해 버렸다. 살인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오르골을 독차지했던 일가족이 탐욕꾼들이며 죄인이고, 그들은 천국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그는 믿고 있다.

재판관들은 이 자의 뻔뻔함에 개탄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그의 마지막 기도도 "천국에서 오르골 소리를 듣게 해주십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사형집행일 당일, 범인은 갓난아기로 돌아가 천진난만하게 울고, 살인사건은 애초에 없었던 일로 '리셋'된다. 일가는 살아났으며 범죄의 기억도 없다. 오르골 하나만이 영영 종적을 감췄을 뿐.

리셋된다면, 이야기는 어디로 돌아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적 권력의 구조의 희생자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여성들의 삶을 뒤집기 위해서는 수많은 살인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저와 제 뒤를 잇는 동족(동성에 한정)의 착취에 눈 감아, 가부장제에 굴종한 여성들이 안타까웠다. 역사 속의 많은 여성들이 살해보다는 자해를 택해왔기에. 인격 수양이라는 이름 하에 보다 부드럽고 보다 인자하게 형성되어왔을 참을성. 일찍이 거세된 폭력성.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있을 때, 누군가는 자신을 죽이고, 누군가는 다른 이를 죽인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인간 생명에 대한 끔찍한 범죄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에너지의 폭발하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은, 전자의 분출구 없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광기의 폭력적 배출도 일종의 탄탄한 권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가난이 내 목을 조를 때 누군가를 패거나 죽이거나 강간해도 좋다는 것, 이것은 역사가 남성에게 발행한 면죄부가 아니었던가.

@BRI@말이 없고 겨울 싸리나무처럼 말랐던 친구 하나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묵묵히 참아왔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진탕으로 마신 날에는 여지없이 어머니를 때렸고, 강간이 수반됐다. 어머니가 방문을 잠근 날에는 톱으로 문을 뚫었다고 그렁그렁 눈물을 삼키며 자취방 침대 맡에서 친구가 조근 조근 털어놓던 이야기는 좀체 잊히질 않았다. 난 이야기를 들으며, 차라리 시간을 돌려 그를 죽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이것은 마음 뿐,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 없어 가정폭력 상담소와 쉼터의 연락처가 인쇄된 '종잇짝'(종잇짝! 경험 앞에 서류는 그야말로 종잇짝이었다)을 내밀며 그저 눈물을 뚝뚝 같이 흘려주는 일만이 최선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은 얼마든지 감자 캐듯 딸려 나왔다. 그리고 상황이 열악 할 수록, 피해는 사적 구조의 가장 약자인 여성에게로 집중 포화됐다.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라는 교훈적 '속담'까지 당당히 내려온 마당에, 가정폭력 비율이 50%를 넘는 현실보고 같은 건 그다지 충격적 사실도 아니었다. 마르셀 에메는 '남류 작가'라는 그의 작가적 성별로 인해, 여성들의 삶의 기반을 옹호하거나 설명해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참혹함을 꺼내어 소통하고 싶은 의욕이 들게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예요." 당통이 웃으며 말했다. (...) '아기 예수님. 부탁드릴 게 있어서 편지를 썼어요. 제 이름은 당통이에요.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요. 변두리의 세 늙은이를 해치운 건 탓하시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아요. 그 나쁜 놈들의 집에서는 안 태어났을 거예요. 머지않아 끝일 것 같으니까. 여기서는 달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일단 천국에 가게 되면 멜로디 상자를 내려주십사 하는 거예요. 먼저 감사드리고요. 건강하길 빌게요. 당통 드림'(p 188-189 <당통> 中)

그리고 나는 책을 덮으며, 일가를 살해한 완력과 가난한 자를 위로한 예술의 축복이 여성들에게까지 내려지기를 빌었다. 아기 예수가 아닌 그 아기 망아지님, 아기 개구리님 그 누구에게라도.

파리의 포도주

마르셀 에메 지음, 최경희 옮김, 작가정신(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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